히말라야 트레킹기 : 제1편 설렘의 여정
제 1 편 : 설렘의 여정
히말라야 트레킹기 머 리 말
정말 기막힌 아름다움을 나는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사진을 찍고, 그 것을 보여주며 지인들에게 자기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게거품을 내며 말할 수 있는 것 외에 정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흰구름이 길게 7부 능선을 가로 지르는 눈덮힌 ‘거네스 히말’ 연봉을 바라보며
보다 많은 것을 가슴에 묻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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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며 보는 풍경은, 오르면서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답다.
아마 한번 본 것을 각도를 바꾸어 다시 음미하는 풍취가 더해져서 일 것이다.
오르면서 간과한 것을 다시 수용하여 소화하는 여유와 폭이 생겨서 일 것이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은퇴 후의 나의 삶이 포기의 삶이어서는 안된다.
여유와 폭을 가지고, 시각을 바꾸어 삶을 음미하고, 둘러볼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시절의 미숙함을 사랑으로 보상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본문중에서)
우리 부부가 히말라야 300 km 트래킹이라는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큰 일을 해내게 된 실마리가 된 것은 2004 년 7 월말 백두산 산행이다. 당시, 예정된 30년 직장 생활의 종료를 앞두고 착잡한 기분에 쌓여 있는 나에게 집사람은 내 기를 살린다며 함께 'UP산악회'가 주관하는 백두산 산행에 등록했었다.
거기서 중등부 학교 여교사인 방 선생과, 저널리스트이며 사진작가인 백두산(예명)님을 만났다. 두 분 모두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로, 백두산과 히말라야 트래킹을 주 상품으로 약간은 동호인 모임 성격으로 운영하는 'UP산악회'에서, 일테면 파트타이머로서, 산행일정 등을 거들어 주고 대신 저비용으로 이들 명산들의 등반을 즐기는 그런 분들이다,
두 분들로부터 히말라야 등산 경험을 듣고, 다음 일정에 함께 할 것을 권유 받았는데, 우리 부부도 한번 해보겠다는 엄두를 내게 된 것은 이 분들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전혀 남들과 다른 초인의 면모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선생은 조그만 체구에 귀염성(?)이 넘치는, 대학 졸업한 딸을 둔 장년의 여성이고, 백두산님은 7 순의 과묵한 노인의 모습뿐이기에 저 분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망설임 없이 이 호감이 가는 두 사람과 히말라야 트레킹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하게 되었다.
우리의 네팔 트래킹 일정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네팔 서부의 관광도시 [포카라]로 이동하여 [안나푸르나]봉을 베이스캠프까지 오르고, 다시 동부로 이동하여 [랑탕]계곡, 5,000 m 높이의 [체르고 리] 봉 등정, 4,800 m 급 [코사인 쿤드 패스] 종주, [해럼브] 고분지의 종주를 포괄한다. 총 거리로는 시판되는 일반 히말라야 트래킹 상품의 3 배에 해당하는 약 300 km 의 대장정이었다.
UP산악대장의 훌륭한 인솔 덕으로, 나와 집사람도 다른 일행 열 사람과 함께 이 대장정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트래킹 중 기후는 좋은 날씨와 적절한 변화가 안배되어 산행의 성취감을 증대시켜 주었고, 중도에 마주친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조우, 귀국 예정일에 발생한 국왕 친위 구데타 정변, 이로 인한 일주일간의 네팔 내 억류 등은, 내가 역사의 현장에 와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도 주는 장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 끝은 내 스스로 ‘내가 아직은 쓸만한 놈 이다’ 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트레킹 중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백두산님이 하신 명언, “ 이게 바로 트레킹이야 !” 하는 말씀이 일품이었다.
이번 트레킹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내가 어떤 변화에도 좌절하지 않고 “ 이게 바로 인생이야 !” 하고 후배들에게 한수 훈수를 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다.
2005. 2 월 10 일
제 1 편 : 설렘의 여정 .
출 발 일
2005. 1. 5. 수요일
인천공항에 새벽 7시까지 집결해야 한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기온도 급강하 할 것이라는 전날 예보도 있었다.
밤잠을 설치고 4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서둘렀다. 중국 동방항공 MU 5250 편으로 9시 상해로 출발했다. 상해에 도착하여 Royal Nepal Air로 갈아 타는 시간은 오후 3시, 짐을 찾아, 다시 네팔항공에 체크인 하게 되어 있어 번거롭고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네팔 항공은 정시에서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의외로 B457 항공기가 가득 찰 정도로 승객이 많다. 한국인이 주종을 이루는 것 같고, 일본인, 네팔인 중국인들이 보였다. 상해에서 카트만두까지 운행시간은 6시간 30분, 편서풍의 영향으로 카드만두에서 상해까지의 역방향은 4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상해에서 이륙해서 2시간이 지나니 창밖으로 산의 정상들과 높은 능선들이 바다의 섬들처럼 운해 위에 떠올랐다. 3시간이 지나서는 맑은 날씨로 산악지형이 마치 큰 지구의를 보듯이 뚜렷이 보였다. 산맥의 흐름, 하얀 선을 이루는 강줄기. 비행기 여행을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래를 내려 보면 내가 마치 지구를 벗어나 지구의 자전을 바라보는 신비스런 느낌이 든다. 속도감이 상실되고, 나 자신 공중 부양 된 느낌이다.
해질녘 지평선 위로 주황색 띠가 겹쳐진다. 회색이 가미된 이 황혼 띠는 화사하지도 않아 더 아름답다. 회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다. 어두워지면서 황혼 띠는 옅어져 사위어 가면서 하늘과 땅을 구분해 주더니 종국에는 사라졌다. 땅위에 띄엄띄엄 불빛이 성긴 별처럼 반짝인다.
카트만두에는 현지시간 7시 30분 도착했다. 출국 심사대에서 미화 30불씩 비자발급 수수료를 받고 비자 스탬프를 찍고 통관 시켜준다. 공항 건물은 단층구조로 군용막사 같다. 밖에 나오니 박대장이 “짱” 이라고 부르는 교민 여자가 직원들을 데리고 나와 목에 화환을 걸어 주며 반가워한다. 작은 키에 억센 둥근 얼굴의 소박한 표정이 시골 친척동생을 만나는 것 같이 다정해 보였다. 40 세, 본명 한선미, 자기 별명을 산적두목이라고 소개하는 여걸이었다.
버스는 직육면체를 연상시키는 낮은 높이의 반듯한 모양인데, 중형 크기로 짐을 천장에 얹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50 년대와 60 년대 초반 드럼통을 두둘여 만들었다는 그런 식의 차로, 창문은 나무 후레임에 유리를 끼우고 힘받이로 양철을 덧 박아 놓았다. 비라도 오면 줄줄 비가 샐 우리 어렸을 때의 그 차 모습이다.
호텔 짱은 좁은 골목 안에 있어 차에서 내려서도 100 여 미터를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건물은 4층 콘크리트 건물이고 여유 있는 정원을 갖고 있다. 대원이 함께 한식 저녁을 먹으며 환경 변화에 따른 긴장감을 풀고, 각자 배정된 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 했다. ‘안나 프르나’ 와 ‘랑탕’ 에서 사용할 짐을 분류하고 포터가 운반할 짐과 각자가 배낭에 넣어 짊어질 짐을 구별해야 했다. 작업이 끝나니 11시가 넘었다. 처음 침낭에서 잠을 잤다. 포근했지만 수시로 깨어서 실제 잠은 3시간이나 잤을까.
포카라 향발
1. 6. 목요일
새벽에 마신 찌야(네팔 티)가 향기롭고 좋았다. 웬만한 외래 향료에 뒤집힌 비위를 안정시켜 줄 것 같이 입에 맞았다. 7시 반쯤 버스를 타고 ‘포카라’ 로 향했다. 그러나 시내에서부터 차들이 엉켜 움직일 수 없다. 가게 앞이나 곳곳의 빈터에 궁끼 들린 군중들이 몰려,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허튼 호기심만 보이고 있다.
도심을 벗어나자 상황이 조금 좋아졌다. 그래도 양옆중 적어도 한쪽은 절벽인, 중앙선도 없는 구절양장의 좁은 길을 고물차들이 곡예를 한다. 우리가 탄 차도 크게 다르지 않아 이 엉성한 엔진과 브레이크를 믿을 수 있을까 싶었다.
중도에 있는 마을 입구에서 뒷바퀴에 바람이 빠졌다. 그래서 마을에서 수리를 하는데 타이어를 때우는데 2시간이 족히 걸렸다. 우리들은 하릴없이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귀가하는 학생들을 잡고 말을 걸거나 하며 기다렸다.
♧ 다양한 인종과 개성 :
유럽인들을 빼닮은 외모에서부터 동남아시아 말레이 족 같은, 때로는 표한스럽고, 때로는 천사표의 다양한 종족( 네팔에는 36개 종족이 살고 있다.)들이 다양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카페트를 뒤집어 쓴 수도승(?) 같은 모습도 보였고, 죽은 살색의 쪼글쪼글한 노파가 누더기를 걸치고 기웃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 카트만두 시내에 많은 군상들.:
모두 할 일없이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남의 모습을 훔쳐보는 모습. 5~60년대 우리들도 그런 모습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우리도 그랬었다. 산악 국가인 이 작은 나라에 2,300 만명의 인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깎아지른 협곡 옆으로 거의 정상까지 만들어진 계단식 경작지 :
실제로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조금이라도 넓게 퍼진 개활지는 한두 곳에 불과 했다. 10시간 200 km 장정 동안 그랬다.
♧ 좁고 비포장된 도로 :
길은 왕복 2차선이라기에 부족하다. 무당집 감실 같은 치장을 운전석 지붕에 올려놓은 둔중한 트럭과 기타 차량들이 뒤엉켜 벼랑 위를 운전한다. 포카라까지 전복트럭 1대, 충돌차량 3건, 고장 차량 서너 건을 목격했다.
♧ 곳곳의 검문 :
검문과 통행료 징수 부츠가 여러 곳 있었다. 이들은 그 좁은 길에 삼사중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심하고 느리게 일을 처리 했다. 그들이 이 가난과 절망감을 가중시키는 원흉으로 보였다. 이 방치된 도로에 통행료 징수라니 !
‘포카라’에 도착 했다. 초입에서부터 안나푸르나 연봉과 마차푸차레산의 설봉이 구름위에 아득히 부양 되어 신비롭게 보였다 우리는 고급 주택가 지역의 게스트 하우스에 투숙했다. 얼마 전에 개원 했다는 짱의 포카라 분소라고 한다. 털보 수염을 기른 정전무라는 한국인 직원이 있었다.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나니 날 것 같은 기분이다. 포카라 야시를 둘러 값싼 등산의복과 장비를 구입했다. 만원 내에 고급 브랜드의 배낭, 등산 아우트웨어 등을 살 수 있다. 한국에서 개당 10만원이 넘는 리키 스틱은 개당 3만 5천원에 살수 있었다. 대다수의 명품 브랜드는 가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