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기 : 제1 편 레바논
1. 머 리 말
2007 년 새해를 맞이하고 벽두에 떠나는 성지 순례의 길. 결혼 30 주년을 12 월에 지나신 형님 부부, 3 월이면 같이 결혼 30 주년 맞이하게 될 우리 부부가 이를 기념하여 함께 갖자고 한 여행을, 독실한 천주교도이신 형님 내외분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이 성지 순례로 결정했었다. 마침 분당의 교우들이 뜻을 모아 순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어서, 우리들은 스케줄 결정 등에 대한 부담감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지도 신부님이신 조학균 신부님 포함하여 19 분이 이 순례에 함께 했다.
이 성지순례를 통해서 나는, 그동안 성경이나 강론을 통하여만 읽고 주입된 가르침들, 그래서 어쩐지 나의 삶과는 멀고 생소하게 느끼어 지던 것들을 몸으로 체험하며 소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류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오감으로 느끼면서, 신기하게 그 분의 신성적인 면 보다는 그 분이 겪으셨을 인간적인 고뇌에 더 짜릿한 정서적인 공감과 그 분에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은 , 아마 예수님의 활동 무대이셨던 갈릴리아 지방의 아담하고 평화로운 시골적인 분위기와 정통 유대교의 배타적이고 고집 불통스러움, 그리고 당시 로마의 어마어마한 문명의 위세를 이번 순례길에서 직접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필연적으로 그래야 하기나 한 것 처럼, 우리의 이번 순례길의 대부분이 거대한 로마 유적의 확인에 할애 되었다.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 곳곳의 유적지들에서, 우리는 차라리 로마 본토에서 보다 더 거대하고 위압적인 로마의 신전을 주축으로하는 유적들을 체험했다. 마치 예수님과 기독교를 알려면 로마를 이해해야 하기나 한듯이..
순례와 여행은 어떻게 분별 할 수 있을까 ! 나는 이번 성지 여행을 망설임 없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성지 순례로 표현하고 싶다. 이번 순례를 통해, 단순한 앎에서 체험이라는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나 자신이 경험한 내면의 변화가 스스로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랬던가 ? 단순한 앎을 체험으로 숙성 시키는 것을 순례라고 한다면, 그동안의 나의 다른 여행들은 어땟었던가.? 알고만 있는 것들에 대한 실제 체험의 욕구가 여행의 기본 동기가 아니었던가.? 그러면 그동안의 나의 모든 여행들도 순례여행이 아니었을까 ??.
2009. 2 월 여행기를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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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지 순례를 위한 기초지식 정리
□ 신약의 시대
신약의 시대, 예수님 시대를 맞을 당시의 지중해 연안의 상황을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지중해 문화권을 통합하는 헬레니즘 문화, 정치적으로 이 고대세계를 통합한 로마제국,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경쟁력 있는 교민 사회 -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 외형적인 특성이라면.
헬레니즘 문화로 대변되는 학문과 철학의 발달, 그리스, 로마의 제국화와 정치력의 확대로, 종교적인 면에서도 보다 보편적인 해답이 필요한 시점이었음에도, 당시의 지배국가인,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密儀 종교와, 농촌지역의 전통 민속종교들, 심지어는 삼라만상의 영들로 가득차 있다는 막연한 의식까지 뒤섞여 있는 원시 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내면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헬레니즘의 도시들을 발굴하는 학자들은, 이들 고대 도시들에서 규모가 큰 히브리인 회당 - 시나고그- 들이 발굴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고대 종교들이 퇴락하는 시대에, 디아스포라'의 히브리인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 신앙의 기반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바올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써 보낸 대로(갈라 4 - 4) 예수님은 때가 찼을 때에 오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선교사들은 '로마의 평화' 의 우산 아래, 제국 내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로마의 잘 정비된 도로와 항로는 물론, 현지에 뿌리내린 히브리인 교민사회인 디아스포라가 든든한 발디딤판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히브리 교민들은 실제로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는 히브리인의 3 배수준인 200 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히브리 인들은 바빌론에서 돌아온 뒤 근 오백년을 두고 외국의 정복과 통치하에 살아 왔다. 그리스제국의 치하에서는 이집트의 프토레마이오스 왕가에 조공을 바치고, 지배자들은 그리스어를 배웠다. BC 198 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같은 그리스계, 셀레우코스 왕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몰아내고 팔레스티나를 점령하였는데 그들도 BC 190년에는 로마군에게 패하였다.
승전후, 로마인들은 셀레우코스 왕가에 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셀레우코스 왕가는 이를 빌미로 이스라엘 도시와 신전들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 이교의 건축물을 세우고, 신전에다 제우스의 제단을 쌓고, 그 제단에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유대인들은 되지를 부정하다고 하여 먹지 않는디..
이 같은 폭정은 끝내 <마카베오> 의 반란을 유발하였다.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잠시 해방을 맞아서 <유다 마카베오>의 주도하에 BC 165년에 성전을 정화할 수 있었다. 반란을 주도해온 <하스모니아> 가문출신의 대사제 <아리스토불로스>는 BC 104 년에 왕으로 자처하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기원전 63 년 로마의 개입을 야기하여, BC 37년에는 대사제인 군왕이 로마인에게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팔레스티나는 로마에 복속되어, 시리아를 다스리는 총독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 로마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일정 자치권도 허용하여, 이두매아 출신 <헤로데>를 팔래스티니 왕으로 봉했다. 그는 BC 37년부터 AD 4년까지 팔레스티나를 다스 다스렸는데, 예루살렘 새 성전 건축 등 야심만만한 토목사업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유다인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헤로데가 죽자 로마 황제는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봉하였다. 그러나 유대지역과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맡았던 아르켈라오는 잔혹하게 통치 하였다는 이유로 바로 직위 해제되고, 이 지역은 로마의 직할령이 되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이 다스렸다. 본시오 빌라도는 , AD 26 부터 36 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 계층의 역학적인 구조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가장 강력한 현세적인 힘을 가진 로마정권은 세금징수와 사회질서 유지에 주력하였다. 그 외의 사항들에 대하여는 매우 유화적이었는데, 유대 종교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자신들의 황제나 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는 따위의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단지 반란 같은 로마에의 도전에는 무자비한 징벌로 대응하였다.
로마에 협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기득권 계층으로는, 이두매아 출신 헤로데 왕가와, 유대교 대제관과 귀족들로 구성된 사두가이파, 또 하나의 유대교 엘리트 계층인 바리사이파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의 3 개 계층은 각 계층이 추구하는 바나, 상호간의 알력관계가 있었지만, 핵심적인 사항- 정권유지나 종교사항-을 침해하지 않는 한 로마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과 우호적인 협력관계하에서 유대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면에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서로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 공생의 길을 찾았다.
이에 반하는 세력으로는, 유대의 왕은 주님뿐이라며 무력으로 로마에 저항을 서슴치 않는, 혁명당 (일종의 투사단체)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두차례의 유대의 독립항쟁( AD 66-70, AD 132-135 )을 일으켜 결국은 패하여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 에서 추방되어 근 2 천년간의 유랑생활을 하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예수님 자신도 해방자 또는 메시아로 공언되는 것을 피했다. 백성에게 공연한 희망을 불지르거나,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을 촉발시키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도 위의 두 종교 계파 지도자들과 같은 대 로마 입장을 가지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종국에는 사회안정을 저해한다는 명목하에 그들로 부터 핍박을 받으셨던 것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나 자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상당히 역동적인 건실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바리사이파 같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유대교 신진 에리트 계층의 존재 ( 복음서의 곳곳에서 이들과 예수님과의 열띤 토론의 장을 암시하는 귀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 거대 로마에 저항하는 무력 항쟁 단체의 존재, 수천년을 전승해 온 편벽한 유대 종교관을 뒤엎는 예수님 자신의 존재 등, 내 생각으로는, 어느 사회라도 이들 중 하나만 갖고도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사회로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 교회의 성장
사도들의 지도하에 교회는 우선 예루살렘에서 움텃다.. 처음 예루살렘에서는 스테파노가 유대인들의 돌매질로 순교하는 등을 박해를 당하였다. 그 후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로 퍼져 도시와 촌락에 본거지를 만들어 갔다.(사도 8장).
이런 와중에, AD 34-36 사이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바오로의 합류. 열성 바리사이파로, 새 종파인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히 증오하던 그가 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회심하여 (사도 9 장) 교회 성장의 핵심인물로 다시 태어 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가 로마인 백인대장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 안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히브리인이 아닌 최초의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 결국 오랜 논난 끝에, AD 48 년, 예루살렘 원로 회의는, 히브리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사도 15장). 이것은 교회사상 극히 중대한 결정이고 교회의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선교활동은 크게 강화되었다. 제 2 차 전도 여행에 바울로는 유럽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세 번째 전도 여행은 그의 체포로 끝나지만, 수인의 몸으로 AD 62년에 로마에 당도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사도 28장). 다른 사도들도 세계 각지에서 목숨을 건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사도행전 기술이 끝나는 AD 64년경에는 로마제국의 중요 도시 모두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를 발판으로 주변에 복음이 퍼져나갔다.
□ 예루살렘에서의 예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처음 찾은 것은 소년시절 부모를 따라 유월절을 지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예수는 성전에서 가르치던 학자들 틈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공생활 후반, 마치 회귀하듯 예루살램으로 향하여서, 그곳에서 활동하시며 핍박과 죽임을 당하신다.
성전 뜰에서 법석을 부리는 환전상들이나 장사군들을 몰아 내시고, 기회 있을 때 마다 모인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벳짜다 못 옆에서는 38년을 두고 중풍으로 누워 있던 사람을 고치시고, 실로암 못가에서 태생 소경에게 시력을 되돌려주시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실 때, 베다니아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의 집이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올리브 산을 통과하여야 한다. 올리브 산에는 예수님 활동과 관련된 많은 성소들이 있다. 또 올리브 산에서 성전 아랫쪽의 키드론 골자기를 질러 가는 길가에는 게세마니 동산이 있다. 그곳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하느님께 고통의 기도를 올리시던 곳.
예수님은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못박혀 돌아가시고- 지금은 성안에 편입 되어 있음 - ,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곳도 예루살렘이었으며, 자상의 사명을 다 마치고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께 돌아가신 곳도 예루살렘성 옆 올리브 산에서였다.
□ 유대교 종파들 개관
<바리사이 >
사두가이가 토라, 즉 성문율법만을 고집하였음에 비하여, 바리사이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준 율법은 성문법뿐 아니라 구전율법, 즉 유대 민족에 구전되어온 율법이 있다고 믿었다. 바리사이는 마카베오 반란 직후인 BC 165~160 년경 급부상했는데. 제사장 집단인 사두가이와는 달리 평신도와 서기관들의 집단으로 구성 되었었다. 제사장 출신의 사두가이가 글로 씌어진 토라만이 계시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가르친 반면, 이들은 토라를 해석하고 적용할 때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과 양심에 모순되면서까지 율법의 문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토라의 가르침을 그들 자신의 사상과 조화시키나가야 한다는 진보적이고 학구적인 교파이다.
바리사이는 주로 학자와 경건한 신자가 모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중적 지지를 크게 받았고, <신약성서〉에서도 많은 현실 문제에서 대중의 대변자로 등장한다. BC 100년경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교를 민주화하고 이를 성전 제사장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오랜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서도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배장소로 성전 이외의 회당-시나고그-을 많이 발전시켰다.
이렇게 회당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발달시켰고, 중요하게 만들었으며,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되게 되었다. 유대 항쟁으로 성전이 파괴 되고,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후, 디아스포라에서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를 존속시키고 발전시켜온 것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회당이었다.
<사두가이 >
이 종파의 이름이나 기득권 계층과 관계로 미루어,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사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식과 율법, 하느님의 계시 내용과 범위에 관해서, 바리사이파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사두가이파는 문서화된 모세 5 경(토라)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바리사이와는 달리 죽음 이후의 영혼 불멸성, 몸의 부활,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부인했다. 종교 문제에서도 보수적이었지만, 부와 오만한 태도, 로마 통치자들과 타협 등은 일반 사람들의 미움을 불러일으켰다. 현상유지를 옹호한 사두가이파는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크게 경계했으며, 예수를 재판하고 죽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생활은 성전 예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AD 70) 후에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에쎄네>
BC 2 세기경부터 AD 1세기말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유대교 종파 또는 형제단. 〈신약성서〉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에세네는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재산을 공유했고,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리자에게 통제를 받았다.
바리사이파와 마찬가지로 모세 율법, 안식일, 정결의식을 철저히 지켰고, 불멸과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는 달리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고, 공공생활에 뒤섞여 살기를 거부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고, 은거지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는 금욕생활에 만족했다. 안식일에는 하루 종일 기도하고 토라를 묵상하는 방식으로 지켰다. 1950 년경 <키르바트 쿰란> 근처에서 금욕캠프 유적과 이들의 사해두루마리 성전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라고 생각한다.
3. 레바논의 순례
□ 중간 기착지 도하
2007 년 1월 11일~12일
오늘은 성지 순례여행을 떠나는 날, 밤잠을 설치고 새벽 일찍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아차하며 다시 업드려 두손을 모았다. 성지 순례의 길에 나서는 신자로서 염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금년 벽두에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의 주요 전환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사랑과 은총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먼저 우리 부부의 믿음직한 아들, 공교롭게도 내일, 바로 우리가 떠나는 다음날 수의사 자격시험인 국가고시를 보게 되는데, 녀석이 국가 고시에 합격하여 국가와 인류를 위해 봉사 할 수 있는 재목으로 자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축복 주시기를 기원했고, 사랑하는 딸도 그가 선택한 배우자와 빨리 축복받은 새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우리 부부, 형제,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조카 며누리를 포함한 모든 심신의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축복과 사랑과 치유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중간 기착지인 카타르의 도하로 출발하는 키타르 항공 QR 889 편은 인천 공항에서 정해진 시각인 오후 20시 35분에 정확히 출발 했다. 카타르라는 작은 나라로 향하는 비행기로는 의외로 큰 Air Bus 330 이여서 처음부터 의아 했는데 , 인천공항에서 출발 할 때는 다소 헐거웠던 좌석들이 비행기의 중간 기차지인 상해의 푸동공항에서 빈자리 없이 꽉 채워져 놀라웠다. 기내에는 아프리카로 떠나는 그룹, 터키로 떠나는 그룹 등 흔치 않은 여행을 떠나는 복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도하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30 분 늦은 현지 시간 1월 12 일 오전 7시 10분경. 한국과 시차 6시간을 감안하면 14시간 - 푸동 공항에서의 정박 시간을 감안 하지 않으면 - 이 걸린 비행시간이다. 역시 아시아는 넓은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타르는 면적 약 11,000. 평방 km. 인구 90 만, 그러나 자국인은 20 만에 불과한 작은 왕국이다. 아라비아 반도이 끝부분, 아랍 에미레이트 연방 위에 위치한, 인근 산유 이웃들의 덕으로 반짝 일어난 신기루의 나라라는 인상이다. 높지 않은 3~4층의 흰색 흙벽돌집 같이 생긴 구 시가지 건물들에 대조되는, 2006년 아시안 게임 경기장들과 부속시설, 해안가 신도시에 세워진 화려한 현대식 건물들.. 신기루의 나라. 자국민 20 만에 국민소득2 만불의 나라...
우리는 5시간 을 기다려야 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두시간여 동안 도하시 시티투어를 했다. 알아듣기 쉬운 영어를 말하는 현지 가이드가 안내를 한다. 낙타시장, 과일시장, 아시안 게임 경기장, 신시가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낙타 시장. 검은색, 흰색, 갈색의 낙타, 에미 낙타의 능청스러움과 갓 출산한 새끼 낙타의 휘청거림. 낙타 한 마리의 값이 만불이라던가....
□ 베이루트
베이루트 도착은 현지시간 12 일(금) 오후 9 시50 분. 요르단 살고 있다는 현지 가이드는 이새봄. 아직 아가씨일 것 같은 젊고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다.
레바논 인구는 약 400 만. 약 1만 평방 키로에 불과한 면적을 감안하면 상당히 밀집하여 살고 있음을 알겠다. 베이루트시의 인구는 약 10 만에 이르며 종교의 구성은 기독교 36 %, 시아파 이스람 25%, 수니파 20% 로 구성 된다고 한다.
국민소득 4,000 불 수준으로 인근 아랍국들에 비교하면 높은 경제 수준이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제도적으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에서, 수상은 수니파 무스림에서, 국회의장은 시아파 무스림에서 맡는 권력 분할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데, 이 균형이 깨어 질 때는 내전 상태에 휘말리고는 한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알고 있는 ‘헤즈볼라’ 에 대해서 이 지적인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했다. 헤즈볼라는 시아파에 속하는 레바논 내의 정당이며, 이스라엘과의 전쟁 때 빼앗긴 자국의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정강을 갖고 있는, 친시리아적이며 팔레스타인과는 정치적 이념을 같이하는 정당이다. 내일 여행시 지나게 될 베카계곡이 헤즈볼라의 주 거주지역이라고 한다.
관광객에 대한 테러에 대한 우려의 질문에, 이 아가씨는 독재정권은 자기의 정권 연장을 위해 원래 타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원치 않는 것이라, 관광객은 보호받는 입장이라면서도, “ 위험하기는 위험하죠” 하며 발뺌으로 마무리 했다.
베이루트 시내는 살벌한 모습이다. 경제적 수준이 높아 차량은 많은데 도로 곳곳에 장갑차와 무장군인. 멎은 차를 따라 다니며 구걸하는 어린이들. 그리고 시내 중심부에 펼쳐진 색색의 텐트 들 - 전 수상의 암살, 이에 대한 시리아 배후설 등으로 현 수상에 반대하는 데모 대원들이 수상 퇴진을 요구하면서 거리에 텐트를 치고 거주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다소 생소한 땅에 와서 정치적 상황까지 이해하려니 버겁기도 하지만 베이루트는 난해한 도시이다. 크레인이 분주히 움직이는 고층건물 신축현장, 포격과 내전으로 타고 무너진 건물, 장갑차와 중무장 군인등 살벌한 분위기와 그들 젊은이들의 밝고 따듯한 미소와, 상냥한 ‘Welcome to Beirut' 인사....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구시가지인 ' Star 광장' 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는 무장군인 들이 경비하고 있는 바리케이트 밖에 섰다. 경비군인들의 조장인가 싶은 군인이 전화를 한다. 19 명의관광객을 통과시킬 것인가를 문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려야겠다며, 수상이 시내에 있는데, 그가 시내를 빠져나간 후에 들여 보내도 좋다는 지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목에 두르고 있는 연녹색의 스카프를 벗으라고 한다. 그 색깔이 반정부 운동단체들이 표방하는 색이기 때문이란다. 이 스카프는 여행사가 우리가 쉽게 서로를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준비해준 것이다. 어쩐지 베이루트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몇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우리가 누구이냐고 묻기도 했고, 입국장에서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관심과 질문을 해왔었다.
베이루트 구 시가지에는 정갈한 유럽식 건물들이 많다. 외곽 진입로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통행인들이 거의 없는데도 - 아마도 그때의 일시적 현상일까 - 기념품 상점도 있고, 교회에서는 한 아이의 유아 세례식과 결혼식도 조촐하게 치뤄지고 있었다.
건물의 색깔은 황토 빛 톤 - 현지 가이드 : 레바논 여인- 의 설명으로는 레바논에서 생산되는 사암계통의 석재라고 하는데, 너무 정교하여 미덥지 않았고, 재질과 색깔이 우아하고 부드러워 동행중인 조학균신부의 생각으로도 테라코타 같다고 했다.
*** St. George : 성인 게오르기우스(?~303)
기독교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 재오르지오 혹은 죠지 라고도 한다. 축일은 4월 23일. 이미지로는 창으로 드래곤을 찌르는 백마를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수· 기사, 기사단· 군인, 보이스카우트· 검술가, 영국, 그루지아, 모스크바의 수호 성인이다. 그의 생에 대한 이야기가 5 세기경 신화적으로 기술 되었는데 드래곤과 싸우는 이 이미지는 중세때에 널리 알려졌었다.
이에 따르면, 무서운 드래곤 한 마리가 리비아의 시레나 근처 호수에 나타나 매일 인간 제물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렸다. 시레나왕은 매일 젊은이들을 산 재물로 드래곤에게 바쳤다. 드디어 왕의 외동딸을 드래곤에게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카파도키아에서 온 젊은 기사 게오르기우스 가 말을 타고 긴 창으로 드래몬을 찔러 제압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래곤을 무찔렀다고 공표하며 시레나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 끝에 참수 되었다.
St. George 교회는 동방 정교회의 교회. 높은 첨탑의 모스크를 뒷배경으로 갖고 있는데, 교회 건물 한 면 벽에는 마귀를 제거하는 St. George 의 기마상이 모자이크 되어 있어 눈에 띄일 뿐 색깔과 외형에서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으나 , 내부로 들어가니 정면제단의 이콘, 벽화, 천정화 들은 바티칸 성당의 그것들 같이 화려하고 예술적이다.
제단 앞에 덮여져 있는 카페트를 들춰 보이며 레바논 가이드는 유리로 처리되어 볼 수 있게 처리된 지하의 유적을 설명한다. 이 교회가 비잔틴과 이스람 시대의 교회가 있었던 터에 건물이 건축 된 것이라고 했다. 언듯 스치는 그 아래 구조의 고색창연함과 현란함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가이드가 더 이상의 설명을 안 했고, 곧 진행될 결혼식으로 밀려 나오듯 나올 수 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저녁은 Acropolis 호텔에 투숙했다. 성지 순례인 만큼 매일 미사를 드리는 모양이다. 조신부님방에서 이루어진 미사에서 오늘의 복음은, 가파르나움에서의 예수님의 강론장에 천장을 뚫고 중풍환자를 내려놓는 익명의 네사람과 그를 치료하고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 부분이었다. 조신부의 즉흥적인 강론이 너무 참신해서 이번 순례 여행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1 월 13 일 토요일
6시 40 에 투어를 시작하기로 하고, 모닝콜도 5 시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나는 3 시에 잠에서 깨면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여행일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 걸렸기 때문이다. 어제 미사가 끝나고 자유로운 시간을 가게 된 시간이 9 시였으나 너무 피곤해서 그만 잠들어 버렸었다.
식사 후, 정확히 6시 40분에 호텔을 나설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도로가 붐비지 않아 여행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탄 벤즈 리무진은 해안을 오른 편으로 두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부드러운 해안선과 바다가 평화로워 보이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경사를 보이며 형성된 도시의 외관은 지중해 풍으로, 솔직히 한국의 도시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첫 번째 버스가 머문 곳은 베이루트의 심볼 바위라는 ‘라오쉐’. 벼랑 해안에 면한 두 개의 바위섬을 말하는데, 마치 코끼리 바위 같은, 깍아지른 벼랑을 갖고 있는 두 개의 작은 바위섬이다. 마치 안면도의 할망바위 할배 바위 같은 분위기이다. 해안 자체가 벼랑이어서 일행들은 이곳에서 모두 내려 사진을 찍으며 어린이 같이 좋아했다. 라오쉐는 비둘기 바위 또는 자살바위라는 이름도 갖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시돈 과 띠로
시돈항은 역사가 오랜 페니키아 시대부터의 도시이었다고 하며, 십자군 전쟁시 십자군의 상륙지였다고 한다. 십자군이 건설하였다는 ‘바다의 성 : Castle of Sea/ Chateau de la Mer' 의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하여 갖는 신비함은 언제나 그 옛날 과학이나 장비가 지금보다는 훨씬 못미치는 핸디캡에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경이로움에 근거한다. 이 바다의 성에 대해서도 역시 나는, 어떻게 그 당시의 항해술로 이 해안에 상륙한 많지 않은 병력으로, 저렇게 정교하고 견고한 돌성을 전쟁을 수행하면서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다.
시돈의 다른 볼거리는, 중세풍의 촘촘한 석조건물들이 터널 같이 연결되어 미로를 형성하는 골목. 이곳 중세도시 같은 골목에서, 출근시간이어서 부루카를 벗어 던진 가냘프고 아름다운 젊은 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큰길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고, 호기심에 가득차 자신들의 삶을 훔쳐보는 코 낮은 극동인들을 말 없이 바라보는 이 곳 주민들의 순진한 환대도 고마웠다.
시돈의 중세식 골목 풍경
우리는 참배하기로 한 St. Nicholas Cathdreal 이 아직 열리지 않아, 시간을 죽일 겸, 이 고전적 거리의 Cafe 에 들어가 레바논 커피를 들며 이 분위기에 몸을 담구었다. 낮은 천장과 회벽으로 마치 동굴 내부 같은 Cafe 의 분위기... - 인위적 으로 만든 것이 아닌, 중세 그때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분위기에 촛불을 켜고 도란거리며 마시는 커피는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동행한 자매님들이의 입에서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경쾌한 노래들이 튀어 나왔다.
St. Nicholas Cathedreal 은 사도 바오로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 되기 전 시돈항에 머물던 장소에 세운 교회 - 그리스 정교회 교회이다. Cathedreal 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좁은 골목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장소의 초대 교회 분위기가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그리스 정교의 Icon 들과, 허술하고 오래 된 나무 의자들이 우리들의 오만한 하루하루의 삶을 책하는 것 같았다.
사도 바오로의 기념성당을 나와, 마치 고성 같은 큰 건축물로 들어섰는데, 16 세기에 세운 무역상들의 호텔 같은 곳이라고 한다. 넓은 안마당을 갖는 성 같은 구조로, 2 층에는 숙소, 아래층에는 마구간과 창고, 상품전시대 등 상업용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너무 잘 관리되고 있다보니 마치 아직도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이 느끼어졌다.
다시 40 여 km 를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두로(Tyr) - 성서에는 띠로라고 불리는 곳- 에 닿았다. 로마시대에는 인구가 30 만에 달했다는 이 띠로의 볼거리는 내륙부분의 유적들과 해안부분의 유적들로 나누어지는데, 시내 중심부에 있는 내륙 유적은 고대 공동묘지와 대형 전차 경기장이 주종을 이룬다.
공동묘지는 바닥에 석조 보도가 길게 깔린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는데는, 페니키아, 로마, 비잔틴, 이스람 시대 등을 관통하여 사용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각 시대별 장묘 형식들을 골고루 보이고 있다고 하며, 이 보도 중간 부분에 와서는, 로마 하이드리안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다소 퇴락한 모습으로 서 있다.
띠로의 내륙 유적: 공동 묘지
그 건너에는 석주들이 줄이어 있는 가로를 형성하다가 대 경기장 - 5만명을 수용할 수있는 마차 경기장 - 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전차 경기장의 규모는 이곳이 로마의 변경도시인 점을 감안하면 과분하게 큰 경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들 중 남자들이 경기장 트랙을 돌며 익살스러운 경주를 하고, 여자들은 관람석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다.
띠로의 내륙 유적: 열주가 늘어선 가도와 대 경기장
해안 유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이 띠로를 공략할 때 7 개월에 거쳐 섬과 육지를 잇는 매립지를 완성하고 성을 점령하였다고 하는 그 섬과 매립지인데, 로마 시대에 귀족들의 거리로 조성 하였는지, 대리석 석주가 늘어서 있는 도로에는 모자이크와 대리석으로 바닥을 장식하였고, 가로 양편으로 야외 토론장인 ‘아고라’ 와 대욕장 등의 유적들도 배치되어 있다. 대리석 석주들은 재질이 아주 좋은 대리석 인데, 현지의 대리석이 아닌, 소아시아 지역에서 이송된 대리석이라고 하며, 화강암들은 이집트에서 운송되어 온 것이라고 하니, 당시의 로마의 국력을 상상할 수 있겠다.
띠로의 해안 유적들
시돈과 띠로항 교외는 귤과 바나나 농장들이 늘어선, 성서에 일컬은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바로 그 가나안 땅, 그러나 상업도시로 성장하면서 향략에 빠져 들었음을 지탄하신 것일까,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시돈과 띠로야 소돔과 고모라에 너에게와 같은 정성을 들였더라도 너희보다 나았을 것이다 ’ 라는 호된 책망을 받기도 한 도시이다.
해변에 가까운 강변 식당에서 야채와 물고기가 곁들인 레바논식 정식을 먹고 다시 북상하여 베이루트에서 1 시간 거리에 있는 Dog 강변 - 에집트와 아시리아 간의 전투에 대한 라무세스의 비문과 앗시리아 왕들의 상형 비문 이 있는, 그리고 이들의 흉내를 낸 1차 2차 대전 당시의 작은 승리를 자축하는 영국 프랑스 따위의 승전비들이 늘어선- 도그 강변을 지나 제이타 동굴을 관람 했다.
도그 강변의 전승비들
도그 강변에서 제이타 동굴에 이르는 길은 깊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차는 해변으로 부터 고도를 높이며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 그리고 경사진 입지에 아름답게 지어진 지중해식 주택들과 건물들을 보여 주는데, 마치 007 첩보 영화 등에서 보던 지중해 해변 풍광 바로 그것이다. 이곳을 지나니, 고도가 급격한 높낮이를 반복하다, 별안간 깊고 큰 산속에 떨어진 것 같은 낯설음을 느끼게 하
며 제이타 동굴에 도착한다. 제이타 석회 동굴은 단순한 석회석 동굴, 상층과 하층 동굴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층동굴은 변화무쌍한 종유석들이 아름답고,아래층 동굴은 보트를 타고 동굴 내부의 호수를 유람하는 볼만한 석회 동굴이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들고 6 시 반경 다시 Acropolis 호텔로 돌아왔다.
제이타 동굴 입구, 계곡의 다리 위에서
종합하면, 베이루트 아니 레바논 전체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해안에는 지중해와 귤과 바나나를 경작하는 전원 풍경이 조화되는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이 있고, 그 해안선에서 조금 동쪽으로 이동하면 바로 험준한 산악지대로 연결된다. 레바논의 면적이 경기도 보다 적은 1 만평방 키로미터에 불과 한, 해안선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임에도, 동쪽 산악지대에는 2,000 m 가 넘는 산이 10 여 군대나 있다고 하니, 다양한 역사와 자연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의 사람들이 고루 갖추어진 사랑스러운 나라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내전이라는 스스로 만든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일까.
□ 비블로스
1 월 14 일 일요일
새벽미사와 6시 반의 아침 식사 후 ‘비블로스’ 로 향하였다. ‘비불로스’ 는 페니키아 시대부터 시돈. 띠로와 함께 해상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던 곳으로 특히, 비블로스 라는 지명이 파피루스, 바이블 과 어원을 같이하는 지명으로서 동지중해의 중요한 무역항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성서에서는 ‘그발’ 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난다고 하고,페니키아의 상형 문자의 발상지로 지목 되고 있다고 한다.
해변에 거친 응회암 같은 굵고 각진 석재를 거칠게 쌓은 성이 있는데 십자군 시대의 성곽이라고 한다. 아치형 성문과 창문들의 흔적- 나중에 석벽으로 개조한 흔적- 이 있어 서유럽식 성곽 인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의 높은 곳에 올르면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성에서 해변까지 돌로 조성된 유구와 지하에 깊게 설치된 석실묘등을 조망 할 수 있다. 그중 한 석실묘는 BC 2 세기 경의 비블로스의 아히람 왕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 석실과 옆의 왕비 석실이 통하도록 되어 있어 죽어서도 서로 영혼이 오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현지인 가이드가 설명했다
비블로스의 십자군 시대의 성곽
BC 2 세기경의 비블로스 의 아히람 왕의 묘소 유적
석곽과 석실의 구축구조와 자재가 정교하고 거대하여 BC 2 세기경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아 현지 가이드에게 의문을 제기 했더니, 레바논 현지인인 여자 가이드는 이곳의 역사가 8 천년에 이른다며 BC 1,300 년경에 이미 독자적인 세력을 갖는 동 지중해의 주요 무역항이었으며 이것이 구약의 아브라함 시대 보다 이전인 것으로 아브라함 시대 때에 이미 이곳은 페니키아 문화의 중심축의 하나였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나의 의구심을 일축했다..
어쨌든 이 십자군 성은 페니키아 유적 ,그리고 그 후의 유대와 로마 유적, 다시 이스람과 십자군의 유적들이 혼재된 역사적인 장소인 것만은 틀림없어 그 문화유적의 다양함과 구체적임에 기가 질렸다.
비불로스를 출발한 차는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여 지중해와 바다로 면한 경사에 아름답게 지어진 주택들을 뒤로 하며 올라 어느 덧 멀리 설산과 산줄기들이 중첩되는 고지대로 오른다. 중도의 길에 차를 세우고 한국인 가이드 이새봄은 크고 아름다운 두 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이 성서에 솔로몬 하느님 성전 짓는데 사용하였다는 그 ‘레바논의 백향목' 이라며 사진들을 찍으라고 한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에 사용하였다는 레바논 백향목 앞에서 형님과 함께
□ 바알 벡
차는 이렇게 레바논 산맥을 넘는다. 2,000 m 이상의 산이 13 좌가 있다는 이 산맥을 지나 고원 분지 형태를 달려 ‘바알 벡’으로 달리는데 이곳을 ‘베카 계곡’ 이라고 한단다. 지대가 높지만 토지도 비옥해 보이고 강우량도 적정한 듯 주위는 푸르고 포도밭들로 경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넘은 레바논 산맥과 계곡 맞은편의 ‘안티레바논 산맥’ 간의 사이는 계곡이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넓은 폭 10km 수준의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바알벡은 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 또는 페니키아인의 종교인 바알신 신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곳에 유대인의 침공하였었고,로마 점령 이후에는 로마인들이 쥬피터 신전,박카스 신전,비너스 신전 등을 건립하였는데 그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위압적이다. 원형 석주의 지름이 거의 어른의 키에 가깝고 회랑의 보와 천장에 조각된 신상의 모습 등, 2천년전의 석조 건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거대하다.
현지 가이드는 이것을 기원전 1세기 전후에 형성되었다고 설명 했다. 나는 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탄 노플로 옮긴 이후의 그것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것은 여기의 신전 유적들이 전에 로마에서 보았던 것들 보다 더 웅장하게 보였기 때문인데,
엄청난 바알벡의 유적들
집사람과 형수님
앞은 레바논인 가이드
같은 시대 로마의 그것을 능가하는 규모의 엄청난 바알벡의 유적들
1 세기 경, 로마의 전성기에 , 변방의 식민 도시에 그들 수도에보다 더 큰 신전을 가지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 가이드는 - 영어도 잘하고 박식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 로마의 콘스탄틴 노플로의 수도 이전시기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고의 있던 시점이기 때문에 로마 신의 신전 등은 전혀 건축 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 과연 그랬구나 싶었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난 이 후에는 황제의 명으로 제국내의 그리스 로마 신전들의 폐쇄하고 파괴하는 행위가 행해졌으니까.
어쨌든 왜 그들은 이 변방 도시에 그들 제국의 수도에서 보다 훨씬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였을까. 그들이 제패한 거대한 오리엔트 제국의 통치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전성기의 로마 시대에 이 오리엔트 도시에 이런 거대한 신전을 구축하는 로마인들의 정치, 통치철학이 경이로웠다.
거대하고 기죽이는 이 로마의 유물들에 비하여 이도시의 생활은 풍요롭거나 자부심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형적으로 가난하고 현금이 아쉬운 군상들이 이 신비로운 유적주위를 얼정거리며 구걸 행위 같은 기념품 파는 호객행위를 한다. 어떻게 이런 멋진 관광 자원을 가진 도시가 이렇게 가난할 수 가 있는 것일까.
바알 벡의 거리 풍경
점심은 현지식으로 하고, 국경도시 ‘머스나’로 이동한다. 출국수속과 시리아 입국 수속을 별도로 받아야 하는데, 의외로 레바논의 출국수속이 까다롭고 불친절한데 비하여, 반서방적 정책을 취하고 사회주의 국가이니 조심하여야 한다는 시리아의 입국수속은 - 시리아 현지 가이드가 우리의 여권을 모아 함께 받아 온 것이기는 하지만 - 수월하고 거침이 없었으며 수속을 기다린 곳에는 현대적인 면세점이 있어 다소 의외였다.
국경에서 다마스커스로 달리는 길은 레바논 보다는 다소 덜 푸르고, 도시도 회색빛이 돌았지만, 정갈함은 레바논 보다 나은 것 같았다. 다마스커스의 칼톤 호텔 에 묶는다. 호텔 앞에 공공건물이 있는데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새벽미사를 가졌기 때문에 저녁 후에는 남녀 별로 친교 자리를 갖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