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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을 따라서 : 친구의 서해안 도보 여행기

반달이네 집 2010. 1. 22. 15:30

서해안을 따라서

- 도보여행기 (목포→강화)

 

                                                                                                                   이 찬 웅

 

  도보여행은 나의 오래된 호기심, 그러나 오랫동안 잊혀진 꿈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무전여행이 유행이었다. 배낭을 매고 전국을 주유했던 동네 형들이나 친구 형들의 무용담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회도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그 꿈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30년 넘게 근무한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노트에 정리하는데, 불쑥 도보여행이 튀어나왔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어렸을 적의 꿈 하나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직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 한 것은 한비야의 국토종단기와 김훈 의 자전거여행을 읽으면서였다. 그리고인터넷 카페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을 통하여 동호인들과 몇 번인가 1박2일 걷기를 하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평소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했던 내가 해안 길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내 고향이 바닷가(목포)라는 것과 내가 해군이었다는 것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산길이나 내륙 길은 아무래도 버겁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해안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서해안을 선택하게 됐다. 동해안이나 남해안보다 서해안이 훨씬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모든 도로가 해안 길은 아니겠지만, 항상 서해를 바라 볼 수는 있으리라. 서해안을 걸으며 매일 노을을 볼 것이다. 수평선 너머로 툭, 떨어지는 석양의 태양을 보고 싶다, 단 한번 이라도. 서해의 섬들도 가보고 싶다. 최소한선유도는 들려야지. 그리고 김제의 넓은 들판도 걸어봐야지. 그 들판은 벼 이삭이 황금빛 춤을 추는 가을이 제격이겠지만, 뭇 생명이 태동하는 봄날도 괜찮을 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2009. 4. 22. (일주일 전)

  오늘 처음으로 배낭을 꾸려 봤다. 장기 도보 여행자들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배낭을 열댓 번은 쌌다 풀었다 했다고 한다. 가져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것은 가차없이 빼라고 했다. 심지어 눈썹도 빼놓고 가라 했다. 나도 배낭을 꾸려보니 30리터 배낭은 어림도 없다. 몇 리터인지 표시는 없는데 대충 두 배정도 크기의 배낭에 넣으니 꽉 찬다. 무게도 12킬로그램이 넘어간다. 우선 코펠, 바나, 연료를 빼고, 짐을 풀어서 하나 하나 다시 따져 보아야겠다. '집 나가서 개고생' 안 하려면.

 

2009. 4. 27. (이틀 전)

  머리를 짧게 깎았다. 군대 훈련소 시절(1974년)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바짝 짧게 깎은 것이다. 너무도 어색하여 모자를 쓰고 집에 왔는데, 아내는 더 멋있다며 만져보자고 한다. 여행 중에 머리감기 편하도록 짧게 깎은 건데, 머리 한 복판이 휑하다. 머리를 깎은 또 다른 이유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라는 스스로의 독촉이었다.

 

2009. 4. 29. 맑음 (첫날)

  지금은 도로가 되어버린, 옛날 우리 집이 있던 곳.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고, 나와 우리 7남매가 낳고 자란 곳, 목포시 대성동 135번지에서 이번 도보여행은 시작되었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에 있는 초의선사 생가 터의 정자,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은 일품이었다. 정자에 올라서니 풍경소리가 청아하고, 추사의 주련 또한 운치가 있다. 마룻장 틈을 벌려 그 사이로 연못의 물이 보이도록 해 놓은 솜씨는 장인의 여유일 것이다. 팔베개를 하고 마루에 누웠는데 천정에 뭔가가 아른거린다. 아, 연못의 물에 반사된 햇빛이 천정에서 촛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우연일까, 계산된 건축일까? 장인의 천재성이라고 믿고 싶다.

 

5. 1. 맑은 후 흐리고 비 (3일째)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인지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걸으면서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하루 약 4리터 정도)소변이 마려운 탓도 있고. 둘째 아들이 3일간의 연휴를 맞아 아버지와 함께 걷겠다고 서울에서 출발했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시간이 남아서 터미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세탁소에 있던 동네 분들이 말을 걸어온다.

"지도 들고 댕기는 것을 보니 땅 보러 댕기는 갑소잉?"

"아니요. 목포에서 강화까지 도보여행 중인데,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화가 으딘디, 참말로 거까정 걸어 갈라요?"

대답대신 등에 매단 깃발을 가리켰다. 깃발에는 서해안을 따라서, 목포→강화 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뭐땀시 그라요?"

"다른 사람은 차타고 여행 다니잖아요. 저는 차대신 걸어 다니는 거죠."

"으디가 편찮으시요?"

"제가 조금 돌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워따, 징해라. 뭔말을 고렇게 허시요? 으디가 아퍼서 치료를 할라고 걷느냐니께."

함께 웃고 말았다.

 

5. 5. 맑음 (7일째)

  내 외모가 좀 불량하게 보인 탓인지 (남양군도의 일본군 같은 모습에 손가락끝만 나온 장갑을 끼고 일주일째 면도를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선그라쓰까지 쓰면. 풋!)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쏟아낸다. 어디서 왔느냐, 뭐 하는 사람이냐, 며칠 걸렸냐, 왜 걷느냐, 잠은 어디서 자느냐 등등. 심지어는 집사람이 뭐라고 그러더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의 식당아주머니도 그랬다. 아침식사를 주문하고 말을 건네자, 이것저것 묻더니, 도보 여행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고 했다. 혼자서 전국을 일주 하는 65세 된 할머니도, 70 이 넘어 보이는데 전국을 세 바퀴 째 돌고 있다는 어느 할아버지도 식당에 들렸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많다. 그러니, 항상 겸손 할 일이다. 아주머니 앞에서 내가 걸어 온 길을 자랑이라도 했더라면,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우리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손님이 덥석 내 손을 잡으며 "형님, 존경합니다." 그런다. 고향이 강화 교동도 인데 이 근방 건설공사 현장에서 덤프트럭을 운전한다고 했다. 나처럼 도보 여행하는 사람을 처음 본다며 이름도 묻고 전화번호도 물어왔다. 내가 걷는 도보여행의 종착점이 강화라 더욱 감격했던 모양이다. 이런 것이 여행의 작은 재미다.

길을 걷다 쉬고 싶을 때는 길가에 있는 산소가 제일 좋다. 그래서 산소만 보면 쉬었다가고 싶어진다. 양지 바른 곳인데다 대개 그 옆에는 나무 그늘이 있고 땅에는 잘 손질된 잔디가 깔려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양말까지 벗고 봉분에 허리를 기대면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양말을 벗고 바람을 쐬면, 발바닥 속은 화끈거리는데 살갗온도는 내려가니 발바닥이 얼얼해진다. 몸살이 나면, 몸 안의 온도와 피부의 온도 차이 때문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잠시 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원기가 회복된다. 묘지에 잠드신 분이 나그네에게 베푸는 음덕이라고나 할까. 다음으로는 동네 입구에 있는 정자가 좋다. 정자 옆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없어도 괜찮다. 정자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온다. 그분들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다. 나도 동네 분들에게 내 갈 길을 한번 더 확인 받고, 때로는 지름길을 소개 받기도 한다. 세 번째는 버스 정류장이다. 시골에는 벽돌로 지어 놓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두 평정도의 버스정류장이 있다. 마을 표시도 있고 행선지도 있어서 이정표 역할도 한다. 의자도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나, 대개 먼지가 많이 쌓여있다. 네 번째는 아무데나 철퍼덕 앉으면 된다. 아스팔트 바닥이나, 풀밭이나.

 

5. 6. 맑음(8일째)

  휘적휘적. 성큼성큼. 느릿느릿. 어그적 어그적. 혼자이니 내 맘대로 걷는다. 왼편에끼고 걷는 서해가 바닥까지 드려다 보인다. 서해가 이리 맑을 수도 있구나. 서해는 항상 개펄에 적신 탁한 바다라는 선입관을 여기서 버려야 했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그림자가 오른쪽으로 눕기 시작하자, 배낭을 메고 깃발을 펄럭이며 나를 따라 걷고 있는 어떤 사내가 보였다. 앉으면 따라 앉고 걸으면 따라 걷고. 빨리 가면 빨리 오고 천천히 가면 저도 천천히 온다.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녀석이 자꾸 움직인다. ㅎㅎ 혼자 놀기인가?

부안군 채석강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더니 해가 바다 위해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석양은 해면에 어리고 모래사장엔 물새 몇 마리 서성인다. 붉은 해는 이제 그 눈부신 광채를 잃고 서서히 수면 아래로 사위어 간다. 밝고 빛나던 젊은 날이 지나면 아름다운 고요의 노년이오고 삶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리는 것이다. 나의 삶도 어느덧 석양의 문턱에 와 있다. 나의 노을도 저렇게 아무런 미련 없이 편안하고 고요하기를……. 서해안을 걷기 시작하면서 매일 이러한 서해의 낙조를 기대했었는데, 오늘 비로소 보게 되었다.

5. 11.바람,맑은 후 흐리고 밤늦게 비 (13일째)

열이틀을 걷고 오늘 하루 군산시 선유도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침에 일어나 빨래를 하면서 그 동안 입고 다녔던 긴 바지도 빨았다. 빨래라야 물에 헹구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땀에 젖은 바지를 처음 빤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尙有十二 微臣不死의 장계를 올리고, 명량해전에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후 이곳 선유도에 와서 열흘 정도 휴식을 취했다고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나도 12일을 걷고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숫자와 장소가 일치해서 기분이 묘하다. 더구나 나도 해군 출신 아닌가. (ㅋㅋ 내가 너무 오버했나?)

서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여러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다들 내일처럼 걱정해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번 도보여행을 완수해야 될 책임감 같은 것을 느낀다. 여기는 아직 쾌청한 날씨. 비는 아직 오지 않으나 바람이 많이 불어 내일 배가 올지 걱정이 되었는데,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물위로 걸어가는 재주가 없으면 기둘려야지요." 라고 한다. 날씨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살아가는 섬사람 특유의 느긋함 앞에서,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대책이 없으니 걱정은 하나마나이고, 하나마나 한 걱정은 왜 하고 있는가, 그런 말씀이신 것이다.

 

5. 13.맑음 (15일째)

  어제 내려왔던 아내는 떠나고,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 온 친구와 둘이서 전형적인 지방 국도(617번 도로)를 걸었다. 앞서가던 그가 점심을 먹자고 찾아 든 집은 '木音山房'이라는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백반을 주문하고 집 주위를 둘러 보았는데 집의 구조나 창문배치, 황토 벽난로, 긴 의자, 황토를 구워 만든 신경림 의 시비, 뜰의 풀숲에 몸을 반쯤 감춘 여인 나상, 나무에 매단 철종 등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우연히 들여다본 연못에서 커다란 황금빛 잉어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혹시 미술 전공하셨어요?"

"아~니요, 그냥 촌에 사는 사람이에요."

음식도 깔끔하고 맛이 있어서 이번 여행 중에 먹어본 백반 중에서 최고였다. 수줍은 듯 다소곳한 아주머니는 이 집의 주 메뉴가 보신탕이라 했다. 아니, 이 집의 분위기와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어떻게 보신탕을 연상 할 수가 있겠는가? 납득하지 못하는 우리의 표정을 보았는지, 이곳 충청도 서천 지방에서는 개고기를 생명의 음식으로 여기기 때문에 부모님 상중에도 보신탕을 먹는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결합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신탕은 좀 시끌시끌한 시장판 같은 집에서 억세게 생긴 아주머니가 입담 섞어서 팔아야 제격 아닌가.

 

  5. 16. 비 (18일째)

숙소에서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이제는 결단만 남았다. 하루를 여기서 뭉갤 것인가, 빗속을 걸어 갈 것인가.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운치가 있고 추억에 남을 것 같아서 걷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보령방조제를 건너 보령시 천북면 방면으로 가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도로는 빗물로 넘치고, 달리는 트럭들은 우리에게 물 대포를 쏴댔다.

주막도 비를 맞네 /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 가는 나그네

쉬어 갈 줄 모르랴 / 한 잔 술을 모르랴 (한하운님 / 비 오는 길)

심정이야 다르겠지만, 외양은 한하운님의 나그네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천북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아주머니가 소주 값을 받지 않는다. 빗 길 조심하고, 강화까지 잘 가시라는 의미란다. 세상살이가 이와 같다면 다들 오순도순 살 수 있을 텐데…….

홍성방조제를 지나 대하(大蝦)축제로 유명한 홍성군 남당항에 도착한 것은 4시 반. 우리는 신발도 젖고 내의도 젖고 마음도 젖었다. 몸은 물론 젖은 솜이고.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맨 처음 눈에 띄는 숙소로 들어갔다. 어서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따뜻한 방에 몸을 좀 눕히고 싶었다. 아직도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5.17. 흐린 후 갬 (19일째)

  아침을 먹고 남당에서 친구는 버스를 탔다. 서울로 돌아 가는 것이다. 지난 9일 동안 함께 걸었다. 저도 좋아서 걸었다고는 하지만, 발바닥의 물집을 참으며 먼 거리를 동행해 주었다. 항상 맛있는 먹거리에 신경을 써 주어 그와 함께 걷는 동안 이번 여행이 '맛 기행'인가 싶을 정도로 가는 곳마다 그 지방 고유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 그가 그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맙네, 친구.

다시 혼자다. 서산 간월도로 가는 길에 만난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그 동안은 논밭에 일하는 사람이 없어 농사일이란 게 항상 바쁜 것은 아닌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어제 내린 비로 논물이 흥건하고 경운기소리,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니 비로소 농촌에 사람이 사는 것 같다. 워낭소리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듯, 논에서도 밭에서도 소가 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번 여행 동안에 본 소라고는, 멍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축산농가의 소들뿐이었다.

천수만 A지구 방조제 위를 걸었다. 동해가 맑은 소주라면 서해는 탁한 막걸리다. 탁한 것과 더러운 것은 다르다. 차디찬 이성의 맑은 물 보다는 시시비비를 넘어서 따뜻한 정으로 모두를 품에 안은 순한 막걸리가 서해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간월암. 암자는 단아하고 만공스님의 편액은 편안했다. 주변의 요사채와 매점 건물이 간월암의 유현(幽玄)한 맛을 뭉개버린 느낌이다. (아이고, 스님들아….) 밀물이 되면 물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간월도. 그곳에서 달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런 인연까지는 없는지 간월암에 도착 한 것은 정오께였다.

천수만 B지구 방조제 위를 걷는데 가슴이 탁 트이고 속이 후련해졌다. 힘껏 숨을 마시고 마음껏 내뿜었다. 백두산 가는 길에 보았던 만주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잠시 어질했었다. 탁 트인 바다와 끝없는 농지, 그리고 부남호를 바라보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목청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러 보고 싶었다.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차오르다가 일시에 "펑!"사라지면서 속이 텅 빈 느낌을 들었다. 왠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괜히 흥겨운 느낌으로 방조제를 건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시원하고 마음이 가볍게 느껴진 것은.

 

5. 19.맑음 (21일째)

  오늘은 왼쪽 무릎이 가끔 욱신거린다. 그 동안 물집이 생기지 않도록 발바닥과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 그쪽에만 신경을 썼더니 왼쪽 무릎이 섭섭했었나 보다. 자기에게도 신경 좀 써 달라고 심통을 부리는 것 같다.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응답차원에서 관절통증 완화제를 한 알 먹고 무릎보호대도 착용했다.

10시 조금 넘어 태안군 만리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백사장은 길고 깨끗했으나 해안에 바짝 붙어 있는 상가들이 눈에 거슬렸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다가와 인사를 청했다. 자기들은 차를 타고 오면서 나를 봤다고 했다. 청년들의 과분한 찬사와 격려를 받고 기분이 흐뭇하였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나이 든 사람들보다는 젊은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즐겁고, 젊은이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가 그 끔찍했던 2007년 12월 씨프린스호의 기름유출 사건으로 직격탄을 맞은 곳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연의 자정능력과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 합쳐져서 이처럼 신속하게 회복된 것이다. 지금은 바닷가에 세워진 박동규 시인의 시비만이 그날의 악몽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닷가 우체국에 고객용 PC 가 있었다. 물론 인터넷도 된다. 덕분에 나는 우체국 창가에서 인터넷 편지를 쓰고, 몇몇 인터넷 카페에 흔적도 남겼다.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옆에서 편지를 썼던 청마 유치환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면 정취가 없는 풍경이라고 말씀 하실까, 편리한 세상이라고 말씀하실까.

1시경 서울에서 내려 온 아내를 천리포 수목원에서 만났다. 이번 여행 중 아내는세 번째 왔다. 다이어트 삼아 걸으러 온다지만, 혼자 걷는 남편이 걱정돼서 오는 것인 줄 안다. 천리포 수목원은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정을 받은 곳이라 한다. 해안 전망대에 있던 한옥 한 채가 기억에 남는다. 서울 홍제동에 있던 사대부 집이 헐리게 되자, 이를 구입하여 그대로 옮겨 놓고 설립자인 벽안의 민병갈 박사님(원래 미국인인데, 한국인으로 귀화했음)이 거기서 기거했다 한다. 그집은 낭새섬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파도 소리, 솔잎 향기, 바다 바람이 한데 어우러진 기막힌 곳에 있었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그분이야 말로 이 시대의 조선 선비가 아니었나 싶다. 그 집 툇마루에 앉아 소나무 사이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맛은 오늘 관광의 백미였다.

 

5. 20.흐림 (22일째)

  아침을 거르고, 차량 출입이 통제된 태안군 신두리 해안 사구 길을 걸었다. 풀섶에 아침 이슬이 맺혀있는 해안 사구 길은 환상적이었다. 새소리와 파도소리가 어우러지고 길에는 간혹 짐승 발자국과 그들의 배설물이 눈에 띈다. 해당화는 정말이지, 섬 색시처럼 수줍은 표정으로 무리 지어 피어 있고, 사구 위로 올라가면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저 멀리 흰색의 포말이 아련하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하고 고요했다. 산에서는 이런 적요한 느낌을 받은 적이 가끔 있었지만 바닷가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오늘, 이른 아침 한 시간의 산책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5. 22.흐림 (24일째)

  도보 여행 중에 받는 질문 중에 가장 어렵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걷는데요?"다. 왜 목포에서 강화까지 걸어가느냐는 것이다. 오늘 서산과 당진을 잇는 대호 방조제에서 만난 어린 병사도 그런 질문을 했다. 참,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냥…."이라고 말했다. 그냥. 무언가 이유는 있지만 말이 마음을 담지 못 할 때 우리는 '그냥'이라고 말한다(인터넷에서 본 구절). 그러나, 술 한잔 하면서 속내를 털어 놓으면 하찮은 말들이 주절주절 꼬리를 물고 쏟아질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해 보고싶은 일이라서, 해외여행도 좋지만 국내도 촘촘히 돌아보고 싶어서, 보다 자유롭고 싶어서, 먹고 자고 사람 만나는 일상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 혼자 사색하며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 보려고, 혹여 글감을 얻을까 해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냈다는 느낌을 맛보고 싶어서.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그 대답이 어렵다. 아마도 그 대답은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변이 어려운 것처럼.

 

5.24. 맑음 (26일째)

  아산 방조제는 아산만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농염한 자태로 누워 있었다. 서해는 아산만의 개펄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 내밀한 곳까지 헤집고 들어와 조심조심 방조제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소리 없이 물러간다. 하루에 두 번씩. 그런 서해를 아산 방조제는 말없이 안아주고, 등을 다독이며 떠나보낸다.

오늘 아산만 방조제를 건너 경기도까지 들어 갈 생각으로 무리를 해서 속도를 올렸더니 발바닥이 몹시 화끈거린다. 하루쯤 더 걸린다고 누가 뭐라 그러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몸을 혹사 시켜서는 안 된다. 지금은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살 달래야 한다.

 

5.25. 맑음 (27일째)

  남양 방조제를 건너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매향리 역사기념관 건립예정지를 지나며 이곳이 한동안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매향리 그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50여 년간 미 공군의 폭격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매향리 앞바다 농섬은 내가 보기에도 육지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우리정부나 미 공군 측이나 주민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었던 것 같다. 어찌됐던, 2005년 8월에 폭격장이 폐쇄되고 주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기념관 설립 부지에는 '매향리의 시간'이라는 임옥상씨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포탄 잔해들이(아마, 불발탄을 수거한 것인 듯싶었다.) 벌겋게 녹슨 채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가까이 보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나름대로 조형미가 있었다. 기둥과 유리를 이용한 칸막이 안에 포탄의 잔해를 푸줏간 고기처럼 매달아 놓기도 하고 로봇형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시뻘겋게 녹슨 포탄의 몸체들이 흡사 괴물로 변해버린 물고기의 모습 같았다. 5cm 의 작은 물고기부터 2m가 넘는 백상아리까지. 금시라도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들 것 같다. 마치 '에어리언' 영화에서처럼.

 

5.27. 맑음 (29일째)

  끝없이 이어지는 13.4km 의 시화 방조제를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한낮의 뙤약볕 아래 제단을 마련해놓고,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다. 무당인 듯, 佛子인듯 목탁을 치는 여자 옆에서 두 여인네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혹시,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의 명복을 비는 것일까? 한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무더운 한낮에 비손 하는 여인네들의 염원이 안쓰러웠다.

시화방조제의 끝이 보일 무렵, 난데없이 시멘트 길 위에 꽃이 피어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니, 전봇대를 설치하면서 시멘트 길과 전봇대 사이에 손가락 굵기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린 화초가 전봇대를 감싸고 소담하게 잎이 났고, 그 잎 사이로 꽃이 피어 있었다. 이 질긴 생명력 앞에서 일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나를 전율케 했다.

 

5. 29. 맑음 (31일째)

  인천공항 고속도로와 만나는 곳에 영종대교 기념관이 있었다. 계단으로 된 좁은 통로를 통해 올라가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를 겸한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에는 영종대교에 관한 기록물이 전시되고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눈길을끄는 것은 빨간 우체통 이었다. 우체통에는 '느린 우체통'이라는 표시와 함께 여기에 엽서를 넣으면 1년 후에 배달된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라는 도식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무척 신선한 느낌을 주는 발상이었다. 나도 가족들에게 보내는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1년 후에 받아 본 느낌이 어떨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5.30. 맑음 (마지막 날)

  12시 20분, 드디어 동막 해수욕장.

여기까지 오는데 31일 하고 반나절이 걸렸다. 동막에 도착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덤덤했다. 동막 해변에 큰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 무슨 생각이 날까 궁금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쑥스러웠다. 풀코스를 완주한 감동은 서해안의 밀물처럼 슬금슬금 천천히 오려는가.

2009. 6. 20.비 (에필로그)

여행을 다녀 온 후 만난 사람들이 이런 덕담을 건넸다. 더 젊어졌다. 더 건강해 보인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 몸에서 기가 느껴진다. 물론 인사로 하는 덕담인 줄 안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서 비슷한말을 들으니 솔깃해졌다.

'정말 그런가?'

혹시나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역시나 후줄근한 한 사내가 있을 뿐이다.

지난 3개월은 행복했었다.

4월에는 여행 준비를 하느라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는 일이다. 계획은 오래 전에 세워 놓은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목록을 만들고 소리 소문 없이 이것저것 준비하고 점검하면서 은밀한 재미를 맛보았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혁명군처럼, 거사를 계획하는 독립군처럼.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자신감은 서로 상쇄 된 듯했다.

5월은 걷느라고.

지도를 들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길을 찾아가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마치 밀림을헤쳐나가는 탐험대처럼, 보물을 찾으러 가는 해적처럼. 근심도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걷는 동안만큼은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었다. 머리가 먼저 텅 비고 가슴마저 비니, 어느 순간 맑은 환희를 맛보기도 했다. 일년 365일을, 그렇게만 살아 갈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랴.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돌아가서 오욕칠정에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진짜 삶이다.

6월은 여행기를 정리하느라고.

여행일지와 사진을 드려다 보며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은 기쁨이었다. 그 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걷는 것보다 여행기를 정리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도보여행은 남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괜한 겸손이 아니다. 조금 튼튼한 다리와 조금 넉넉한 시간과 약간의 용기와 작은 금전적 여유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여행기간 내내 마음 졸이고 기도하며, 집과 남편 사이를 오가느라 분주했을 아내에게 맨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번 여행의 절반은 아내의 힘이다. 함께 동행해준 친구와 둘째 아들도 고맙고, 응원 차 내려온 큰 아들, 격려차 찾아 준 친구들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여행 도중 전화와 문자로 격려를 보내준 친지들, 도보 여행을 무사히 마치라고 빌어준,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인터넷 카페에 격려와기도 말씀을 남겨주신 분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아, 이번 여행은 나 혼자서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