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기/가고 싶은 여행 : 타인의 여행기

진운(지호아빠)의 마음여행(월정사 단기 출가학교 수학일기)

반달이네 집 2011. 8. 22. 16:19

                                           마음 여행

                                                       -23일간의 출가 일기-

                                                                                                                                           이찬웅

 

  오대산 월정사에 단기출가학교라는 것이 있다. 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 했을 때 겪는 행자과정을 미리 체험해보는 곳이다. 일반 수련회나 템플스테이와는 달리 일상생활 자체를 수행으로 삼아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곳에 참가신청서를 내면서 출가동기 란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저는 아마도 전생에서 절집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법당에 들어가도 낯설다는 느낌이 별로 없습니다. 고승들의 일화를 들으면 가슴이 설레고 데자뷰현상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그 궁금증을 풀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단기출가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내가 기다렸던 인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절집 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전생에 관한 제 생각을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확인하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면 무척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입니다.

 

인연이 닿아서 그랬는지, 출가동기가 특이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입학통지서를 받았고, 옷가지와 침낭을 챙겨서 2011. 7.1. 새벽에 아내와 아들의 전송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2011. 7. 2. 맑음

 

“옴 살바 못자 못지 사다야 사바하”

오전 9시, 참회진언을 큰 소리로 끝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삭발식이 거행되었다. 불가에서는 머리털을 무명초(無明草)라 했다. 번뇌의 풀이자 세속적 욕망의 상징이라 했다. 그래서 머리를 깎는다. 아니 민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 얼마간의 머리털을 달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머리털을 완전히 깎고 밀었다. 단지 머리털을 잘라냈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 보인다. 산은 더 푸르고 하늘은 더 파랗다. 그러니 정말로 번뇌와 잡념의 무명을 잘라 낸다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져 보일까.

하루 종일 일없이 화장실에 자주 갔다. 시간만 있으면 갔다. 그곳에 가야 거울이 있으니까. 머리가죽만 있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하다. 통째로 들어난 머리통을 처음 본다. 중 고등학교 시절이나 군대 훈련소에서도 2부(그때는 ‘리부’라고 했다)머리를 했었다. 이게 내 머리야? 머리 감촉이 이런 거였어? 마치 다른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기분이다. 다른 살갗처럼 스치면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찍찍이처럼 그 자리에 딱 붙는다. 머리에 물기를 닦아낼 때도 수건으로 밀듯이 하면 안 된다. 분바르듯이 찍어 내야 한다. 머리털을 완전히 밀어내니 머리통이 하얗다. 조지훈님의 ‘파르라니 깍은 머리’는 아마도 달빛 때문이었나 보다. 머리통이 형광등에 반사되고 햇빛에 번쩍인다.

머리를 깍은 후에 행자 복을 받았다. 한복 스타일의 밤색 옷이다. 스님들이 입은 회색 장삼에 비해 소매가 늘어져 있지 않은 점이 다른 점이랄까. 턱없이 큰 행자 복을 입으며 그 옛날의 군대 훈련소 시절을 생각했다. 그때도 이렇게 헐렁한 옷을 나눠주며 옷에다 몸을 맞추라고 했었지.

 

2011. 7. 3. 비

 

어제 깎은 무명초 일부를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에 담아 일주문 근처에 있는 삭발기념탑 주변에 묻었다. 삭발기념탑에는 ‘사바의 여정에 가끔 이곳에 들려, 일주문 밖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을, 초발심 때의 그 간절했던 마음을 추슬러, 삶을 좀 더 치열하게 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어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전나무 숲길에서 삼보일배를 했다. 청중스님(聽衆: 훈련소 소대장격인 스님의 소임)이 목탁을 치며 맨 앞에 서고, 행자들은 4줄로 그 뒤를 따르며 “석가모니불!”을 큰소리로 불렀다. 물구덩이에서도 일 배를 하고 진흙탕에서도 절을 올렸다. 행자복은 비와 땀과 흙탕물로 뒤범벅이 되고 신발 속에는 모래가 서걱거렸다.

나의 초발심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가. 전생이 궁금했었다는 것이 과연 나의 발심인가. 그래도 되는 것일까. 장대비를 맞으며 일주문에서 대법당까지 약 1.5km를 삼보일배 하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삼보일배를 마치고 대법당 앞에서 정렬해 있는데 삭발한 행자들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튄다. 빗방울이 마당가 절구통에서 튀어 오르듯 행자들의 머리통에서 빗방울이 튄다. 여자 행자들의 하얀 머리통에서 튀는 빗방울이 갑자기 서럽다.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삭발을 하게 되어 있었지만 여자들은 원하는 사람만 삭발을 했다. 그런데도 반이 넘는 여자들이 삭발을 했다. 여기서 바로 출가 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인데 얼마나 간절함이 깊었으면 그리했을까.

 

2011. 7. 6. 맑은 후 흐림

 

여기 단기출가학교에 온 20대, 30대 젊은 도반들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온 것만도 참 대단한데 - 특히 20대 학생들은 아마도 부모들의 권유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권했다 하더라도, 머리 빡빡 깎고 행자생활을 하겠다고 방학의 절반을 반납하고 온 젊은이들이 얼마나 기특한가. - 그들의 예의바름에 내심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빨래판을 다 썼으면 넘겨 달라고 하자 빨래판을 물로 헹궈서 넘겨준다든 지, 각자의 식기를 닦으려고 줄을 서있는 데 뒷사람 것까지 함께 씻어 주겠다고 달라고 한다든 지, 햇볕이 나자 방안의 건조대에 있던 다른 사람의 세탁물까지 빨랫줄에 내다 건다든 지, 댓돌 위의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돈한다든 지 누가 시키지 않은 것인데도 일상생활에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들이 참으로 대견했다. 이런 건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몸에 밴 결과인 것이다. 종교 집단이라는 특수성에서 오는 것일까?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미흡하다. 본데 있는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명품은 디테일이 아름답다고 하던가. 이 아름다운 청년들을 가슴으로 안아주고 싶다.

 

2011. 7. 7. 흐리고 비

 

발우(鉢盂)는 승려들의 밥그릇을 말하고 발우공양은 승려들이 식사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절차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자기 발우(승려들은 자기 발우가 정해져 있다)를 가져와서 정해진 자리에 앉는 것부터 시작해서 식사를 하고 일어나는 것 까지 15단계를 거친다. 그 중에는 일곱 번의 게송(佛恩想起偈 ~ 食畢偈)과 열 번의 합장 내지 반배 절차가 포함되어 있다. 발우는 4개로 구성되는데 크기가 달라 작은 것이 큰 그릇 안으로 쏙 들어가게 되어있다. 가장 큰 발우는 어시발우로 오직 밥만을 담을 수 있다. 두 번째는 1분자라 하는데 국을, 2분자는 청수를, 제일 작은 3분자는 반찬만을 담을 수 있다. 발우를 놓는 위치도 엄격히 정해져 있다. 공양을 마치면 숭늉이 나오는데, 익히 알려진 대로 단무지로 닦아내서 그 물을 다 마시고, 2분자에 있던 청수를 부어서 오른 손으로 한 번 더 닦고 그 물까지 마신다. 마지막으로 청수로 한 번 더 헹구고 그 헹군 물을 거두어 간다. 이때 거두어 간 물에 밥알 하나, 고춧가루 한 개라도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규정해 놓았을까. 승려는 신도들이 시주한 음식을 허투루 먹어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뜻이었을까. 군대 훈련소에서 했던 직각식사보다 훨씬 엄격하고 복잡하다.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신도들의 공양에 감사하고, 귀신과 아귀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준다. 특히 신도들의 시주로 마련한 음식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송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공양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이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성직자는 음식을 시주한 신도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웃종교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를 이렇게 불렀다-에 비하여 불교가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했다고 한다. 입교 후 처음으로 듣는 바깥세상 소식이다. 아마도 이곳이 평창군 진부면이기 때문에 들려준 것이리라. 오늘 저녁은 비가 엄청 온다. 뉴스를 안보니 태풍이 오는지 장마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좋다. 몰라도 되는 지금이 참 좋다.

 

2011. 7. 9. 비 엄청

 

어제 밤부터 쏟아지던 장대비가 하루 종일 그칠 줄을 모른다. 오늘 강의하러 오신 현기스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비를 피하러 왔는가, 맞으러 왔는가?”

어려움(苦)을 피하려고 왔는가, 맞닥뜨리러 왔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절집은 우산이 아니라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라고 했다. 수행자는 그 광야에서 홀로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때, 내 마음에서 유성 하나가 푸른빛을 내며 새까만 어둠 속을 가로질러 갔다.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고행이 되고 기꺼이 받아들이면 수행이 되는구나. 고통을 피하려 한다면 고난이 되고 괴로워한다면 그대로 고통일 뿐이구나.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과 마음이 고행을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7년 전 백두산 트레킹과 지리산 종주, 5년 전 어머님의 뇌종양 수술, 재발과 별세, 2년 전 한 달 간의 서해안 도보여행, 그리고 지금의 행자 체험. 2~3년을 주기로 나를 불러냈던 그것은 수행의 방편이었구나. 편한 삶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경계하고 무디어진 마음의 날을 벼리려고 내가 여기 왔구나. 그랬구나.

밖에 나가 쏟아지는 장대비에 흠뻑 젖고 싶었다.

 

2011. 7. 10. 오늘도 비

 

계속되는 비 때문에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게 영 싫지만 앞산에 드리운 안개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법륜전 처마에서 낙수 지는 소리를 들으며 집 생각을 했다. 함께 사는 큰 아들은 어제부터 휴가이고, 따로 사는 둘째는 며느리와 이미 휴가를 떠났을 것이다. 집에 혼자 남아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해진다. 내 하고 싶은 것 찾아서 훌쩍 와버렸으니 야속하다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단기출가도 출가는 출가. 지금 출가 생활을 하는 중이니 여기에 집중해보자. 여기 와서 집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집에 있으면서 절집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멀리 보내 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짜 휴가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 출근시키려 일찍 일어 날 일도 없고, 남편 식사 챙기려 신경 쓸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아내 걱정 하는 척 하면서, 남편의 빈자리에 쓸쓸함을 느껴주기를 바라는 괜한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강의하신 자현스님은 도올 김용옥 선생과 비슷한 데가 많다. 가성에 가까운 고음. 고음에서 갈라지는 탁성. 그리고 거침없는 말투에 해박한 지식까지. 만약 두 분이 TV에 나와서 대담을 한다면 난형난제일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스님들은 어떠신가. 혜성스님은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재주가 있으시다. 개그맨 이혁재가 머리를 깎으면 혜성스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현기스님에게서는 신영복 교수 분위기가 난다. 깊이가 느껴지는 분이다. 젊은 날, 많은 고초를 겪고 이제는 그런 것들로부터 초월한 분 같다. 태경스님은 옛날 영화배우 황정순씨를 연상시킨다. 인자하게 보이면서도 할 말 다하고, 화가 나면 얼굴에 서릿발이 설 것 같은 분이다. 우리 행자를 담당하는 각엄스님(학교로 말하면 담임선생 같은 분)은 ‘달마야 놀자’에 나오는 정진영을 닮았다. 무술도 한가락 하시려나?

 

2011. 7. 11. 또, 비

 

내 앞뒤 도반은 대학생들이다. 그들과 생활하다보니 내가 현업에서 물러나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비해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보고 듣고 이해하는 능력도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스님들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이 마이크 성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쉽게 알아듣고 이해하였다. 만약 내가 지금도 현직에 있었다면 그 떨어지는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권위나 경륜을 내세우며, 내가 옳다고 고집 부렸을 것이다.

 

2011. 7. 12. 비, 또 비

 

오늘부터는 17일까지는 오후 불식(不食)이다. 점심 공양 후 다음 날 아침 공양까지 물 이외는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오후에는 아무것도 드시지를 않았기로 ‘부처님따라 하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뱃살 빼는 기회로 삼을 생각인데 젊은 도반들은 한숨부터 쉰다.

오늘 오후 강의를 듣다가 불현듯 우리가 인도(印度)시간대에 맞추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에 들어온 후 밤이면 9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엔 3시 40분에 일어난다. 평소 1시경에 잠자리에 들던 습관을 생각하다보니, 인도의 9시가 서울의 자정이나 1시쯤 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 있지만 손목시계는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 맞추어져 있는 셈이다. 아니, 그래서 절집에서는 9시에 잠자리에 드는 거였어?

썰렁한 우스갯소리 두 가지.

맨머리가 좋은 점. 샤워시간이 5분이면 된다. 빗질도 필요 없고 머리 말리려고 요란 떨 필요도 없다. 요즘처럼 비가 올 때 얼굴을 하늘로 치켜들거나 손바닥으로 비를 받아 볼 필요가 없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머리가 먼저 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우니까.

사찰을 왜 절집이라고 하는지 아는가. 절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절에서는 모든 일이 절로 시작해서 절로 끝난다. 공양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법문을 할 때도 그렇고 강의 시간에도, 강의를 시작하기 전 강사스님께 먼저 삼배를 드리고 끝날 때 다시 삼배를 올린다.

 

2011. 7. 15. 흐리고 가끔 비

 

오늘과 내일은 ‘묵언수행’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제 옆 도반과 얘기를 하다가 참회를 받아 300회 절을 하고 나서 약간의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정말 한 마디 말도 안하고 이틀을 지내 볼 것이다. 침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험해 볼 것이다. ‘절대침묵 중, 7/15~7/16 죄송합니다.’ 라고 쓴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나에게 말을 거는 도반들에게 보여주었다.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생각했다. 영화는 알프스 산맥의 깊은 계곡에 위치한 프랑스 수도원의 내부 모습과 그곳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가톨릭 수사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수사들은 모두 독방을 쓰는데 식사도 방에서 혼자 먹었다. 기도와 묵상과 독서로 하루를 보냈다. 미사 드릴 때와 일주일에 한 번 4시간의 산책시간에만 방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4시간의 산책 시간에만 대화가 허용 된다고 했다. 일주일에 단 4시간만. 그래서 영화에도 일체 대화가 없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리프렛에 이런 말이 있었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너무도 말이 헤픈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절대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침묵을 잘 지키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저녁 때 가족에게 편지 쓰는 시간에 갑자기 배가 아팠다. 명치부근이 꽉 막힌 듯 아팠다. 준비해 간 소화제를 먹고 참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쫙 났다. 안 되겠다 싶어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스님은 도반을 한 명 소개하며 그와 상담해보라 했다. 그는 의과대학을 마치고 유학중인 의사였다. 십이지장에서 막힌 것 같은데 큰 병은 아니니 계속 문질러 주라고 했다. 아픈 배를 쓸어내리며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저녁은 교육기간 중 단 한 번, 가족에게 편지 쓰는 시간이었다. 다행이 복통은 두 시간쯤 지나서 가라앉았다. 절대 침묵은 깨졌으나 다시 침묵 모드로 바꾸었다. 처음 결심대로 내일까지는 다시 침묵하리라.

 

2011. 7. 17. 비온 후 맑음

 

새벽에 천둥 번개 치고 폭우가 쏟아지더니 아침이 되면서 해가 떴다. 하루 종일 햇빛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방안에 있던 빨래를 내다 말리며 잠시 포근한 행복을 맛보았다. 뽀송뽀송하게 마를 내의와 수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까이서 본 절집의 하루는 분주했다. 같은 일상의 반복이기는 하지만 무척 바삐 움직인다. 새벽 3시 50분에 도량석을 도는 목탁소리가 울리면 여기저기 방에서 불이 켜지고 스님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어서 예불을 드리고 각자 정해진 소임에 따라 제 할 일을 한다. 무심결에 들여다보았던 개미집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개미들처럼 각자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절집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구나. 스님들의 하루가 결코 한가롭지가 않구나. 그런데 스님들은 언제 공부하시는고.

요즘 허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아직은 참을 만하지만 더 악화될까 걱정이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고 내일 삼보일배도 있고 마지막 날 밤에 3,000배도 남아 있다.

오늘로서 오후불식이 끝났다.

 

2011. 7. 20. 비온 후 갬.

 

3일 남았다. 아니, 마지막 날은 졸업식이고 그 전날은 대청소와 선배 동문들을 만나는 날이니 내일 하루와 마지막 3,000 배만 남았다.

집에 돌아가면 월정사가 많이 생각 날 것이다. 월정사는 전나무 숲과 주변 산세가 무척 아름답지만, 풍광보다는 비와 소리로 기억 될 것 같다. 끝없이 내리던 비. 아무리 장마라지만, 열흘이 넘도록 햇빛 한 번 구경 못했다. 참으로 지루한 장맛비였다. 비오는 날이면 월정사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장맛비에 흠뻑 젖은 산사를 조용히 흔들어 깨우던 소리들이 그리워 질 것이다. 이른 새벽, 도량석을 도는 목탁소리. 점점 가늘어지는 은은한 여운이 일품인 대종 소리. 날렵한 여인의 뒤태를 연상시키는 스님이 치던 휘몰이 장단의 법고 소리. 판소리 창법으로 멋지게 음률을 넣던 노스님의 원각경 독경소리. “쾌활, 쾌활이로다.”하는 무상계(無常戒)가 정말 쾌활하게 들리던 스님의 독경 소리. 법륜전 마루에서 듣던 낙수소리. 그것들이 한동안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지금은 교육기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2011. 7. 22. 흐림

 

우리의 숙소 겸 교실인 법륜전 뒤쪽으로 돌아가면 한적한 길이 있고, 그 길 끝에 토담에 둘러싸인 건물이 몇 채 있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걸로 봐서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선방(禪房)인데 건물 전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오늘 운력(울력)시간에 선방 마당의 풀 뽑기를 했다. 지금은 하안거 기간으로 선방 안에서는 스님들이 자신을 백척간두에 세워놓고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선방 안이 무척 궁금했으나 감히 들어 올 생각을 못했었는데 오늘 그 마당이나마 밟아 본 것이다. 댓돌위에 신발이 놓여 있으니 스님들이 안에 있을 것이고 , 우리는 선방의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풀을 뽑으러 왔으니 스님들이 밖으로 나와 볼만도 하건만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에겐 휴식 시간도 아까운 것인가. 30분 정도 지나서 목탁 소리를 신호로 우리는 작업을 중단하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오늘 밤은 이번 교육기간의 대미를 장식할 철야정진 시간이다. 잠을 자지 않고 3,000배를 드린다. 파스를 붙이고 맨소래담 로션을 바르고 수건을 챙겨서 11시에 대법당에 모였다. 자자회(自恣會, 대중 참회의 일종)가 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시작 시간이 2시간 가량 지연되었다. 법당 밖에는 자원 봉사자들이 음료수와 간식을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3천배는 죽비소리에 맞추어 진행 되었다. 50분간 절을 하고 10분간 휴식했다. 그 휴식 시간에 화장실도 가고 음료수도 마시고 간식도 먹었다. 절은 새벽 4시 예불시간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절을 몇 번 했는지도 모르겠다. 허리가 아프면 중간에 쉬기도 했다. 석가모니불을 부르노라 목이 쉬었고 행자복은 땀에 절었다. 역시 젊은 도반들이 마지막 까지 기를 살렸다. 4시 직전, 절을 마치는 목탁소리가 들리자 다들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눈물이 났다. 아, 끝났구나. 머릿속이 텅 비고 그 순간, 멀리 우주 공간을 본 것 같은데, 깜빡 꿈을 꾼 것 인지도 모르겠다.

 

2011. 7. 23. 흐리고 가끔 비

 

아침 예불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고 졸업식 때 입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교 시에 가져왔던 사복과 사물을 지급받고 각자의 짐을 챙겼다. 오전 10시 졸업식을 끝으로 단기출가학교 행자 생활이 모두 끝났다. 졸업을 축하하러 온 우리 가족들과 함께, 단기출가학교에 나를 추천해준 스님을 찾아뵙고 3배로 인사를 드리고 손수 끓여주신 차를 한 잔 마셨다.

(20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