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 여행기/성지 순례기

성지 순례기 : 제 2 편, 시리아, 요르단, 가파르나움

반달이네 집 2009. 2. 18. 16:36

 

4.  시리아 순례

                                                                                         1 월 15 일 월요일

 

마툴라의 성 세르기우스 성당과 테클라 수도원

 

 

  마툴라는 호텔에서 30 분 거리에 있는 메마른 산악지대이다.  마을에 진입하면서 높이 솟은 흙 벼랑에 파진 굴들. 산정상의 마리아 상, 수도원 성당 등이 이스람 사원들과 같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지역은 아직도 아람어를 사용하는 지역 - 예수님도 아람어를 사용하였다고 함 - 이며 초기 교회때 부터의 한 교파인 ‘야곱파’ 교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의 아람어가 아직도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형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분포는 현재는 이스람과 야곱파 교회가 반반씩 점하고 있다고 한다.

 

 

  성 세르기우스 성당은 돌로 지은 작은 성당 - 차라리 수도원이라는 편이 옳아 보인다.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이태리인 카톨릭 신부와 동방 정교회 신부 그리고 수녀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님이 반기는 기색을 보이며 서둘러 미사를 종료하고 이태리어로 우리를 인도 하시는 조학균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고는 - 조신부님은 이태리에서 11 년간 공부를 하셨다.- 반가히 포옹하고 입마추고는 한다.   신부님의 호의로  미사 중인 수사님들과 수녀님들에게 우리가 소개되고 모두가 함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고 함께 제단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 신성한 성당 안에서....

 

 

 성 세르기우스 성당 신부님,수사님, 수녀님들과 함께 

 

  세르기우스 성인은 북부 ‘헤사파’ 출신 로마 수비대장으로 근무 중 기도 하는 것이 동료 병사에게 발각 되어 혹형 끝에 순교한 분이라고 한다. 시리아 교회의 수호 성자로 추앙을 받고 있는 분이라고 한다. 이 성 세르기우스 성당은 지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함께 관리하고 있다.

 

  테클라 성인은 터키 귀족가문의 부인으로 사도 바오로에게 교화되어 터키 남해안 ‘실리프케’ 에 세계 최초의 여자 수도원을 창설하신 분이라고 한다. 박해 때에 이곳에 숨어들어 이 성 테클란 수도원 자리에서 죽었으며,  바위산 위에 세워진 이 수도원 (수녀원) 맨 윗 건물에 유골 안치소가 있다. 

 

테클라 수녀원 정문앞

 

 

테크란 성녀 유골 안치 성당

 

 

테크란 성녀 유골 안치 성당 내부

 

□ 팔미라

 

 

 

팔미라 유적 전경

 

팔미라 :

    고대 시리아의 도시.   지금의 시리아 힘스 주에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지중해 중간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예로부터 카라반의 중계기지로 발달했었으나,  로마가 이 도시의  동서무역의 중요성을 인식고 육성한 것이 번영의 계기가 되었다.  AD 129 년,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  자유시로 인정하였으며,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는 세금을 면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3 세기 들어 로마제국이 서쪽과 북쪽으로는 갈리아,, 게르마니아의 압박, 동쪽으로는 사산왕조의 압박하에 사실상 동방의 경영이 어려워진 시기에,  로마의 갈리에누스 황제가 팔미라 출신 군벌인  '오데나투스'를  로마제국의 동방사령관으로 임명(AD 260) 하고 팔미라 왕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공백상태인 로마 동방경영의 책임을 밑기면서 정치적 중요성이 커졌다.   비교적 로마에 충성을 바쳤던 오데나투스가 조카에게 암살당하는 사건(AD267)이 발생하자, 이를 재빨리 평정한 오데나투스의 제 2 왕후인 제노비아 여왕이  정권을 장악하고 이집트와 터키지역을 정복하고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녀의  팔미라 제국은 AD 272 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평정되어 파괴되고  다시 로마에 종속되었다.  그후 동서 교역로의 역할은 계속되었으나  예전의 번영을 누리지는 못했다.

 

 
 마툴라 일정을 마치고 팔미라 관광을 나섰다.  팔미라는 다마스커스에서 3 시간 거리에 있는,  아람인의 오아시스 도시이었다가 솔로몬 왕에 의해 정복 되기도 했고, 로마 시대에는 친 로마계인 팔미라 왕국이 있었으며,  ‘제노비아' 여왕 시절 일시적이기는 하나 이집트와 터어키등 지중해 동부를 제압한 팔미라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로마시대  황제는 이곳을, 동서교역의 중심지의 역할을 인정하고 자유도시로서  면세 지역으로 지정하여 상권 보호 특혜를 부여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요르단의 페트라 와 함께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도시이었다고 한다.

 

 

 

 

 

 

 

 

 

벨 신전의 유적들

 

  팔미라 유적의 총 면적은 16 만 평 규모고 한다.  대 신전 Temple of Bel -  원래는 아람인들의  벨 신전으로 건축 되었으나, 그 후, 로마, 이스람의 신전으로 변형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  교역시장터,  원형극장 등이 들어 선 로마식 석주들이 길게 늘어 선 가로의 모양등 그  수천년의 풍상을 보여주는   완벽한  유물들이 신비롭다.    이 작은 오아시스 지역에서 이런 거대한  건축술과 문명을 접하면서,  우리 인류 조상들의 위대한 능력 앞에 나 자신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상가 유적의 낙타  등 관광을 유혹하는  현지 청년

 

 

 옛 상가 지역의 열주들

 

 

원형 경기장에서 솜씨를 뽐내보는 자매님들

 

 

지하 무덤 관광

 

 

지하 무덤의 로마 유물

  

 

십자군 시대의 아랍 성의 위용

 

 

 아랍 성에서 내려다 본 팔미라 전경

   

이곳의 ‘탑 무덤. 과 ’지하무덤‘은 로마인들의 유물들이며 산 정상에 세워진 십자군 전쟁 때의 아랍 성에서는  팔미라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다마스커스에서 팔미라에 이르는 사막을 달리는 도중에 바그다드 까페라는 작은 쉼터 가 있다. 커피와 작은 Souvenir 를 판매 하는데 마당에 마차와 운치 있는 설치물들이 잠시의 흥취를 준다.  7 시쯤 호텔로 돌아왔다.

 

 

바그다드 카페

 

 

상당한 미남인 바그다드 카페 주인와

 

 

 바그다드 카페의 밖  풍경

 

 

 

□ 다마스 커스 

                                                                                             1 월 16 일 화요일

 

  호텔에서 7 시에 출발하여 다마스커스 시내로 들어선다. 첫 번째로 차가 머문 곳이 사도 바오로가 탄압을 피하여 교우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성을 내려와 탈출( 사도행전 9장 23~25) 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   너무 이른 시간이라 성당을 입장하지 못하고 길옆에서 사진만 찍었다.

   다마스커스 구시가지 ‘로마 직가’ 에 있는 아나니아스 교회를 참배 했다. 아나니아스는 바오로 사도가 기독교인에 탄압을 자행하다 예수님의 질책을 받고 눈이 어두워 졌을 때 눈을 치료해 준(사도행전 9 장  3~19)  선각자의 한사람.  교회는 자그마하고 허술했다.  작은 마당에 ‘바오로 사도의 눈을 치료해 주는 아나니아스’ 를 묘사한 석고상이 초라하게 있는 정도. 눈을 치료해 주었다는 것은 새 교리를 깨 닳는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가 탄압을 피하여 교우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탈출한 성

 

 

 

 

 아나니아스 교회 정문 (위 )및 내부 모습

 

  어제, 성 세르기우스 성당, 테클란 수녀원에서도 느꼈듯이, 이교도 지역이랄 수 있는 이곳에서 외국 교단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초대교회의 흔적들은 풍요로와 보이지 않아 더 성스러워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위의 허술한 길과 구멍가게들,  동양에서 온 낮 설은 관광객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길들을 포함해서

 

 

오마야드 모스크 앞의 상가 모습

 

  아나니아스 교회 참배 후 오마야드 모스크를 관람했다. 오마야드 모스크에는 십자군 시대의 아랍 측 영웅 살라딘의 유해가 안치 되어 있어서 아랍권의 4 대 성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

  관람이 9시에 시작 되는 줄 알고, 아침 일찍 서둘렀던 우리들은 10시가 개방 시간이라는 바람에 일부는 시장이나 구경한다고 나서고 , 나와 시몬 형제부부, 작은형은 인근의 차집을 찾아 쉬려고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아 - 포장 마차식의 차 파는 곳이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  들어가지 않았다.-   모스크 인근의 은 세공품을 파는 허술한 가계를 기웃거리다 발이 불편한 글라라 자매님을 위해 앉을 곳을 찾는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성실한 서비스에 그만 나는 그 가게에서 은세공 단도 모형 브롯지를 30 불에 사게 되었다.

  아침 시간의 예상치 않은 거래에 흥분한 때문일까, 이 착한 상점 주인은 우리에게 차와 커피를 끓여 내 놓고는 단도 칼 면에 글자를 새겨 준다며 그 은 세공품 가계를 우리에게 온통 떠맡겨 놓고는, 30 여분을 지나,  10 시 10 분이 되어서 헐떡이며 돌아와 글자가 새겨진 단도 브롯지를 건네준다.   단돈 30 불의 매출 상품의, 글자를 새겨 달라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의 귀중품이 가득한 가계를 나에게 맡겨 놓고, 달려나가 약속을 지켜 준 그에게 너 참 좋은 친구구나 하고 악수를 청했다.

 

 

 

착한 시리아인 은세공점

 

살라딘(1138~1193). 이슬람 술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

 

   이집트·시리아·예멘·팔레스타인을 통치했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했다. 이슬람의 가장 유명한 영웅이다. 대(對)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1187. 10. 2)하고, 제 3 차 십자군 원정도 패퇴시켰다.

  살라딘은 쿠르드족의 저명한 가문 출신으로 성장기에는 군사훈련보다 종교공부에 더 흥미를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리아 군사 지휘관이었던 삼촌의 참모로, 제1차 십자군이 세운 그리스도교계(프랑크족) 번국(藩國)들의 공격으로부터 이집트를 방어하기 위해 이집트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1169년 31세의 나이로 시리아 군사령관과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1171 년  이집트에서 시아파 파티마 칼리프 왕조를 폐지하고 수니파로 전환시키면서, 결국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집트의 방대한 농경지를 재정 기반으로 삼아, 살라딘은 소규모이지만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진출 1174~86 년간 자신의 기치 하에 모든 이슬람 영토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아량 있고 도덕적이고 결단력 있는 통치자로서 이슬람교도들을 육체적·정신적으로 재무장시켜, 당시까지 훨씬 강력한 무장세력인 유럽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1187년 7월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아 부근의 하틴전투에서 승리를 시발로. 3 개월 만에 베이루트·시돈·나자렛· 카이사리아· 나불루스· 자파 ·아스칼론(아슈켈론) 등지를 함락하고, 같은 해 은 1187 년 10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였다.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도시를 88 년 전 정복할 당시의 유혈이 낭자했던 것과는 달리 이슬람교도의 재탈환은 극히 평화적이었다고 한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은 유럽에 깊은 충격을 주어, 유럽은 제3차 십자군을 언정을 감행하였다. 제3차 원정에는 유럽의 세 나라의 국왕이 전투에 참가할 정도로 전력을 기우렸지만 결국  1192년 10월 십자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은 살라딘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살라딘은 자신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철수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곧 죽었다.

 

  오마야드 모스크 안에는 세례자 요한의 목 무덤이 있다고 한다. 신전 안에 세례자 무덤이 별도로 구획되어 건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별스럽고, 요한의 목 잘린 곳이 헤로데의 여름별장으로, 이곳 시리아와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성지급 모스크에 상업적 트릭이 있었을까 하는 믿는 구석이 남는다 .

 

 

 

 

 

 

오마야드 모스크

 

 

 십자군 시대 아랍 영웅 사라딘 기마상 앞에서: 다마스커스 시내

 

5. 요르단 순례 : 제라쉬, 움카이스

 

   모스크를 관란하고 국경도시 ‘다라’로 이동하여, 요르단 입국 수속을 받았다.  시리아 국경 사무실과 요르단 국경사무실 사이는 상당한 거리의 완충지역을 두고 있는데 요르단 쪽은 검문과 조사가 예사롭지 않다.  개인 이동의 경우 차의 엔진부분과 차의 밑바닥까지 점검하고, 짐을 풀어 헤친다.

   관광객인 우리는 그래도 대우를 하는 것인지,  남여를  구별하여 수색하는데,  짐들은 모두 X-ray 조사 하고, 하고 일부 짐들을 풀어 헤쳐 수색을 했다. 기껏 양산따위가 X-ray 에 걸리는 것인데, 속옷 등이 담긴 트렁크를 풀어 헤침을 당한 자매 일행들은 상당히 난감해 했다.   게다가 루치아 자매의 여권의 사진 부분이 ,아마도 그들의 부주의로, ,여권과 이탈되어버리는 바람에 이를 국경 경찰사무실에 들어가 해명하고, 요르단 현지 한국 대사관에 이 뒷수습을 의뢰하는하기까지 하여,   제라쉬에서 12시에 들기로 하였던 점심을 3시 반이나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같은 아랍권의 국가가 그렇게 까다롭게 짐 검사와 출입구관리를 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광객의 짐까지 풀어 헤치는 불필요한 꼼꼼함에 짜증이 났다.   여권 문제는 결국 국경 경찰이 우리 차에 동승하여 제라쉬로 오고,  한국 대사관 직원이 제라쉬까지 와서 찟어진 여권에 간인을 찍어 복원시키고 확인서를 끊어 주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제라쉬

 

 

 

  제라쉬는 로마시대 때의 10 대 데카폴리스의 하나이며 가장 부유했던 도시 중의 하나.  고대 도시의 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그대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고 , 나머지 반은 현재 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3 만 명 수준의 인구였다고 하는데,  1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 경기장과 3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목욕탕, 그리고 제라쉬의 주신인 아르테미스 신전, 하이드리안 황제의 개선문, 거의 1 km 에 달하는 석조보도와 돌기둥 열주 등등,    제라쉬- 성서에는 게라사 - 의 볼거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제라쉬의 유적들

 

  로마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왜 그들은 그들이 점령한 땅에다 이렇게 그들의 건축 방식으로 거대한 돌 구축물들을 아낌없이 만들어대었을까. 현재의 기술로도 이런 건축물과 규모는 막대한 돈과 오랜 건축기간이 필요한 것인 것을 염두애 둔다면, 로마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위대함이 불멸의 것이며, 영원히 유지 되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제라쉬 원형 경기장에서 흥겹게 쉬며

 

  이런 위대한 유적들 인근의 주민들은 왜 한결같이 그렇게 초라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초라한 post card 를 들고 시주기를 애걸하며 쫒아 다니는 모습들이 이곳에서도 계속 되었다.  숙소는 요르단 수도 암만의 Golden Tulip Grand Palace Hotel 에 들었다. 비교적 호텔 시설이 좋았다.

 

 

□ 움카이스 

                                                                                       

1 월 17 일 수요일

 

 

 화학성 폐수 거품이 덮여 흐르는 야뽁강

 

   오늘 요르단에서의 일정은 움카이스 순례 후 ‘베싼’ 국경을 건너 이스라엘 영내로 들어서는 것.  중간에 야뽁강에서 잠시 쉬었다 . 야뽁강은 야곱의 행적과 관련 되는 강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 하였다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 곳은 대형차가 진입이 어려워 일정에 넣지 못했단다. 

  그 야뽁강은 놀랍게도  상류의 무슨 공장 때문인지  화학성 거품이 둥둥 떠 흘러가고 있었다.   물 한방울이 황금 같은 이 건조 지대의 강이 값싼 공산품 생산을 위해 이렇게 오염되는 것을 방치하는 요르단 정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들었다.  

 

 

 

 

 

 

움카이스는 지질이 현무암 지역이라 유적 바위들의 색가이 검다는 것이 특징

 

  움카이스도 알렉산더 대왕 정복 후 형성된 10 대 상업 도시인 ‘데카폴리스’ 의 초기 중심 도시.   인근 지질이 현무암 지역이라 석주와 석벽등의 색깔이 검다는 것이 특징. 웅장하지는 않으나 길게 늘어선 돌기둥들과와 공공 시설 유물들이 옛날의 번영을 말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야루묵강 건너로 골란 고원이 보인다.

 

  움카이스를 떠나 베싼 국경 도시에 이르는 길은 비교적 비옥하다. 중간 중간에서 많은 염소 떼를 만났다. 우리는 남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동쪽으로 이스라엘으 두고 남하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을 초월하는 양떼들의 행진

 

  국경 통과는 짜증나는 일정의 하나이다. 요르단 국경에서의 출국 수속이 다시 요르단 공무원들에 대한 혐오감을  야기 시킨다. 무슨 출국하는 사람들의 짐 검사에 얼굴 사진과 지문 날인까지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거의 두 시간 여를 물고 늘어졌다.  

 

   이스라엘 쪽 입국 수속에는 우리가 영어를 하는 척하면 곤란한 상황을 당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오히려 비협조적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다소 시간 지체 되었으나, 이들 이스라엘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문제 해결 자세로 크게 지체 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현지 가이드는 젊고 거의 탈렌트급 수준의 미남자. 천주교 신자라고 하고 전도사라고 하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다. 성지 설명에서 장소에 대한 성경구절을 골라 강독하는 등 완전히 현지 가이드로는 킹카를 만난 것 같다.

 

 

 

6. 이스라엘 갈릴리아 순례

 

  가파르 나움

 

 

 예수님이 악령과 되지떼를 수장한 곳-Kursi-의 기념성당 유적에서

 

 

▪  처음의 순례지는 갈릴리아 호수변의 Kursi : 예수님과 악령들린 사람의 해후와 악령을 되지 떼에 넣어 갈릴리 바다에 수장하는 사건(마르코복음 5장 1~20) 과 관련된  지점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이라고 한다. 정원 같이 꾸민 Kursi Nat'l Park 과 옛 교회터가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가파르 나움:  

  예수님 활동의 중심지의 하나였음.    이 곳에서 활동하고 가르치셨으며 전도 여행을 떠나가셨다가도 이곳으로 되돌아 오셨다.  이곳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시지는 않으셨고, 베드로의 집을 이용하신 것 같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의 가파르나움의 상주 인구는 대략 1,000~ 1,500 명 정도로 예상함.   마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동북부 전선 지역이라 백부장과 일단의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었음. 

  AD 700 년 경 아랍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뒤 20세기 초반까지 풀숲에 뭍혀 있다 1905~ 1921 년에 걸쳐 프란치스코회 성지 보존회애서 시행한 발굴작업을 통해 엤모습을 일부 되찾았음.  현재 복원된 회당은 AD 3~4 세기경 세워졌던 것인데, 그 기초인 검은 현무암 건물은 서기 1세기경의 회당 초석으로 추정된다.

< 출처 :  마르코복음 해설서: 예수를 따라 - 성서와 함께  > 

 

 

다음의 순례지는 ‘가파르 나움’. ‘가파르’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나움의 마을’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예수님의 첫 공생활이 시작된 곳으로 갈릴리아 호수변인 이곳에서 베드로를 만나고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 곳.

 

▪  베드로  집터 기념성당 : 베드로  집터라는 곳에 기념 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원래 5세기 경에 세워진 팔각 팔각형 비잔틴 교회 성당터가 있었는데, 그 지하에 1세기 시대 어부들의 집터가 발굴 되었다.  그 집의 벽에는 2 ~3 세기 순례자들이 써 놓은 기도문이나 베드로의 이름등이 있다고 한다.  현대에  복원된 기념 성당은 팔각형 방주 모양으로  고대 주거 터를 보존한 채, 그 위에 투명 유리를 덮어 바닥으로 하 여, 성당 안에서  지하 유적들을 관찰 할 수 있는데, 유적 보호와 성역화의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이곳은 상당 규모의 거주지가 형성 되었던 곳으로 지척에 예수님의 첫 강론장이었을 유대교 회당 -Synagogue- 유적이 복원되어 있다.  이 성당에서 조신부님의 집전으로 기념 미사를 가졌다.

 

 베드로 집터 기념 성당

 

 

베드로 집터 기념 성당안에서의 미사

 

 

예수님의 첫 강론지일 수도 있는 시나고그(Synagogue)

 

‘행복선언 기념성당’  : ‘가파르 나움’ 에서 북쪽으로 갈릴리아 호수를 옆으로 끼고 올라 요르단 강을 건너면 ‘베싸이다’ 와 ‘코라진’ - 예수님이 질책하셨던 - 으로 갈라지는 길을 통과하는데, 이곳을 지나면 ‘타부가’ 지역이며, 이 곳 작은 동산 언덕 위에 예수님의 산상 설교 터가 있다. 이곳에는 예수님이 참행복( 마태복음 5장 1~12)을 강설 하신 곳으로 ‘행복선언 기념성당’ 이 세워져 있다.

 성당 건물 중앙에 8 각형의 돔 기단부가 설치되고, 그 위로 둥근 돔 지붕이 덮인 건물 구조로, 대성당중심에 아름답고 기념 조형이 있고, 신자들은 팔방에서 무룹 꿇고 기도를 할 수 있다.

  팔각 회랑 벽면 감실에 전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갔다는 안내문과 미사 집전 때 사용하셨던 제의가 전시 되어있다. 팔각형은 조학균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새로운 날 - 인간의 최대의 수인 7 일 이후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선언 기념 성당에서

   

 

  국경 통과에 시간이 지체되어 이 일정을 마치니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갈릴리아 호수 변의 선착장으로 내려와  어두움이 깔린 갈릴리아 호수 선상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마태복음 8장 23~27)을 체험 묵상 시간을 갖고 , 인근의 Ein Gev Resort 에 숙박 했다.  갈릴리 호수에 면한 방갈로식 레조트로 운치가 있고 숙박인도 유럽인들이 많이 보인다.  인근에 있는 키브츠에서 관리한다고 하는데 정갈하게 관리하고 음식도 맛있었다.

  식사 후 형 부부와 호숫가를 산책하며 이야기를 즐기다 일행 교우들과도 만나서 신부님방에 초대 되어 음료와 담소를 나누고 9 시경 숙소로 들었다.

 

 

 갈릴리아 호수변의 숙소 Ein Gev Resort

 

 

▪ 갈릴리아 호수는 갈릴리아 바다, 티베리아 호수, ‘겟네사레’ 라고도 불린다.

‘티베리아’는 이 호텔과 마주 보이는 호수 건너편- 호수의 서북안- 에 헤로데 대왕이 유대인 묘지 터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왕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헌상하여 티베리아라고 명명하면서 그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 호수라고도 불리는 것이라고 하며, 또 호수를 위에서 본 모습에 빗대어 ‘겟네사레’ 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는데 그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다. 갈릴리아 호수는 둘레가 50 여 km. 남북의 길이가 20 여 km, 동서는 넓은 곳이 10여 km 에 이른다고 한다.  . 

▪ 신약성서에는 일반적으로 갈릴리아 호수 북쪽 카다라, 게레사 지역을 데카폴리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방인 지역임을 말하는 통칭이며, 이스라엘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돼지를 이방인의 상징으로 삼는다고 한다. 즉 돼지 ⇒ 악령⇒>군대 의 연상으로 돼지떼가 갈릴리아 호수에 빠져 죽음은 그 맥락에서 유추하면 그 상징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성서에서의 갈릴리아 사람의 의미: 갈릴리아 호수 북쪽 해안 쪽 사람으로, 북이스라엘 ⇒ 단신전⇒>이방신전⇒ 이방인 침입 등의 연상으로 다소 정통성이 없는 지역으로 여겨짐.

 

 

  이스라엘의 첫인상은 잘 정돈된 도로, 깨끗하고 풍요로운 정원과 깔끔한 도시들이다. 여행중에 이스라엘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신뢰감은 우리와 같이 문명권에 살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동료 의식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