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이와 공원길을 산책하면 많은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 공원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탄성을 지르며 쓰다듬고, 제법 큰 아이는 포옹까지 하면서, ‘할아버지! 이 개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예요, 참 귀엽다’하며 호들갑들을 떠는데, 정작 나는 그 아이들의 거리낌 없이 맑은 행동이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지더니 손주가 생기더라'는 동창 친구의 흰소리가 참신하게 들리더니, 나도 딸아이를 결혼시키고, 이제는 곧 돌배기가 될 손녀를 두고 있다. 머지않아, 손녀아이가 걷게 되면, 손녀아이의 앙증스러운 손을 잡고, 반달이와 함께 이 공원을 산책하며, 저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 생각을 하면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아들 녀석이 중학교 다닐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0 여 년 전이다 . 녀석과 산책을 하다 기척에 돌아보니, 녀석이 맞은편 길로 지나가는 또래의 소년과 서로 양손을 흔들며 반갑게 몸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 우리 반 ○○ 이야" 하며 밝게 웃는다. 그때 나는, 녀석의 티없는 모습에 행복감과 엉뚱하게 부러움까지 느끼었었다. 내 어린시절의 다소 고통스러웠던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 고향이 그립다고 한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 낳은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首邱初心) 하고, 서정적인 글과 노래들이 한결같이 고향 그리움을 읊고 있다. 고향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함은 거부할 수 없는 명제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 고향이 무엇일까. 태어나서 자란 곳, 그리고 추억이 점착하여 정서가 어린 곳, 어릴 때부터의 친구들은 허물이 없고, 이웃은 사촌보다 살가워 동구 밖 돌아드는 나를 먼빛으로도 알아 옆집 아저씨가 일손을 멈추고 허리 펴며 활짝 손 흔들어 주는 곳..
이런 고향의 원형에 대한 목마름이 나의 어린 시절의 회상과 함께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나의 아이들에게는 이 원형의 고향을 만들어 주어야할 의무가 나에게 있음을 떠올리게 되었었다. 나의 고향이어야 할 곳운, 멀리 있음도 전혀 무관한 곳이 된 것도 아닌데도,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나는 취학 서너 해 전 나이에 홀로 시골의 낮선 양조부모 손에 맡겨졌었다. 당시 아버님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집안 어른들의 일방적인 추진아래, 손이 없으신 양조부모께 양자 입적 되셨었다. 나는 아버님의 그 때 늦은 양자 입적의 일테면 일종의 징표였었다.
양조부모께서는 그 노년에 공으로 얻은 양손자에게 사랑을 듬뿍 주셨었다. 장이를 불러 꼬마 지게도 만들어 지워주기도 하고, 대청마루 대들보에 동아 그넷줄까지 매어 놓기도 하시며 모든 정성을 쏟으셨다. 하지만, 그곳은 어린 나에게 행복한 곳이 못되었다. 부모님 품이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양조부께서는 양반이라는 자부심과 불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었다. 타성바지 동네에 사시면서도 이웃들을 가볍게 대하는 이웃들이 두려워 경원시하는 존재이셨다. 때문에 나도, 덩달아, 또래와 편하게 어울릴 수 없는 결과적으로 따돌림 받는 아이가 되었었다.
이런 상황은 내가 취학연령이 되어 부모님 품으로 돌려지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의 청년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 시골집을 방학 때에나 의무적으로 들르는 곳으로 생각하는 나 자신과, 집안이 좋아 서울로 유학이나 다니는 딴 세계 녀석으로 생각하는 그 동내 또래들의 불편한 심기를 조화시킬 계기를 만들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곳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별난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분당으로 이사 온 것이 벌써 15년이 넘었으니,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정착한 곳이다. 15 년 전 봄, 당시 신도시 분당에 입주했다. 내 나이 40 대 중반, 딸아이 고등학교 입학, 아들녀석 중학교 입학의 때였다. 지방 발령이다 새집마련이다 하며 수시로 거처를 옮겨온 삶의 마무리였다. 이곳이라고, 처음에는, 내가 정착 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당시의 다른 소시민들처럼 ‘작은 집을 큰 집으로, 비인기 지역에서 인기지역으로’를 지향하는 집단 최면에 걸려 있었던 만큼, 잘 설계된 신도시에, 좀 더 커진 집에 들었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이들이 사춘기와 성숙기를 보내고, 우리 부부도 인생의 원숙기 10 여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이곳에 우리의 삶의 상당 부분이 점착되어, 허튼 고향 이상의 곳이 되어 버렸다. 집사람의 활달한 성격의 도움으로 아이들의 학부모 모임, 가톨릭 교우 모임, 단지내 모임 등 우리 부부의 이웃들과의 교유 폭은 점차 넓어지고 공고해져 왔다. 그래서 함께 산책이라도 할 때면 수시로 이들과 마주쳐 덕담을 나누느라 귀가 시간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서로 속사정을 알고 안부를 교환할 수 있는 이웃들인 것이다. 재작년에는 딸아이가 이곳의 많은 이웃들의 축복 속에 이곳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여기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공부중인 아들 녀석도 다음 해 쯤에는 여기에서 결혼을 올리고 여기에 살게할 생각이다.
손녀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 길들을 산책할 것이다. 함께 걸으며 그녀에게 눈 맞추며 얼르는 이웃 어른들과, 주위에 몰려들어 법석을 떠는 언니 오빠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정말 편안하고 정다운 이웃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만날 삶의 굴곡점 곳곳에서 생명수 같은 활력을 줄 수 있는 그런 고향이 바로 여기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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